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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팔이] 비디오테이프와 비디오 플레이어

필자에게는 꽤 고약한 버릇이 있다. 말로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손길이 끊긴 지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지도 쓰지도 않고 방 한 면을 통째로 차지하는 수납장에 모셔 놓는다. 그러고는 “어떻게 버리냐”며 너스레를 떨고 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필자의 행동에 대한 핑계도 댈 겸 그 오래된 물건들이 여전히 방 한구석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써보려 한다.

수납장의 최고참은 빛이 바랜 비디오테이프들과 제법 몸집이 큰 비디오 플레이어다. 한 10년 전쯤까지만 해도 필자의 하루 일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그들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텔레비전 위에 네모난 셋톱박스가 들어서면서부터로 추정된다. 뒤가 뚱뚱한 텔레비전이 홀쭉한 텔레비전에 밀렸을 때, 그리고 종종 뿌옇게 변하는 화면 때문에 중간 중간 비디오 크리너를 틀어줘야 했던 ‘손이 많이 가는 비디오 플레이어’ 대신 DVD 플레이어가 거실장 한 가운데를 차지하게 됐을 때. 그렇게 옛날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더 흥미롭고 똑똑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매일 저녁 비디오테이프의 선택권을 잡기 위해 아웅다웅 다투던 소리 또한 사그라지고 말았다. 점차 비디오 플레이어와 수많은 비디오테이프들은 구석에서 먼지와의 만남만을 반복하며 귀퉁이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복을 입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즈음에- 필자는 현관 앞에 놓여있는 비디오테이프 더미와 비디오 플레이어와 맞닥뜨렸다. 그 찰나의 순간, 몇 년간 무색해져 버리고 말았던 존재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필자는 비디오 뭉텅이들을 모두 안아서 수납장 한 가운데로 옮겼다. 어느새 닳아버린 버튼 스티커가 달랑거리는 비디오플레이어와 누렇게 바래서 제목도 알아볼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들이 전부였지만, 중간에 비디오크리너를 돌리고 플레이어를 내리치면서까지 텔레비전 앞을 지켰던 소란했던 시절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어쩌면 밑도 끝도 없는 ‘추억팔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에게 비디오란 추억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 그 자체였던 듯싶다. 구체적인 서사가 아닌 뭉쳐진 이미지 그 자체로 저 안쪽에 조각칼로 새겨지듯 각인되는 추억이 비디오였고, 그렇게 그들은 필자에게 단순한 고물이 아닌 사연 있는 애물단지였다.

임현지 기자  liiimhj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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