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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논단] 어느 문학 교수의 이중생활
  • 정종현 한국어문학과 교수
  • 승인 2024.03.3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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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0여 년 동안 한국 근대소설과 동아시아 비교문학을 전공한 현대문학 연구자다. 동시에 대학에서 ‘현대소설의 이론’, ‘현대작가론’, ‘비교문학의 이해’ 등의 교과목을 20년째 강의하는 문학 교수이다. 아카데미에서 소설(서사)과 비교문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내게는 사실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다. 그 비밀은 내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적인 ‘서사적’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낮 시간의 나는 백년도 더 된 이광수의 『무정』이나 염상섭의 「만세전」과 같이 널리 알려진 한국 근현대소설의 ‘고전(classic)’을 가르친다. 비교문학 강의 시간에는 톨스토이, 헨리크 입센, 조지 오웰, 밀란 쿤데라 등 서구의 대작가들 혹은 나쓰메 소세키와 루쉰 등 동아시아 문호들의 작품을 한국문학과 관련지어 열강하곤 한다. 낮 시간의 ‘나’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고전의 힘을 칭송하는 전형적인 문학 교사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허나 밤이 오면 나의 은밀한(?)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매일 밤 학교의 행정 업무와 논문 쓰기, 강의 준비 등에 쫓겨 듀얼 모니터에 십여 개의 창을 띄워 놓고 어지럽게 일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사이 웹서핑에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웹서핑은 숏폼 플랫폼의 쇼츠들이나 화제가 된 각종 OTT물을 한 시간 분량으로 편집해 놓은 유튜브 동영상 시청 등, 웹 세상 속 ‘이야기’들을 목적 없이 떠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매번 이런 웹서핑의 끝에서 도착하는 종착지는 웹툰 플랫폼인 듯싶다. 이를테면, 나는 매주 수요일 자정 무렵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PC 앞에 앉는다. 일주일을 기다린 웹툰의 최신화가 업로드되기 때문이다. 강풀의 「무빙」이 예전에 즐겨 보던 웹툰이었다면, 「미래의 골동품 가게」, 「화산귀환」, 「전지적 독자시점」 등은 요즘 즐겨 보고 있는 ‘최애’ 작품들이다.

‘서사’를 대하는 나의 자아는 이처럼 낮과 밤에 따라 분열되어 있다. 지금 나는 나름 용기를 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내 인식 속에는 OTT의 대중물들이나 웹 서사물은 저급한 것이어서 진지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없다는 ‘고급문화-저급문화’라는 위계화된 통념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30여년도 훨씬 전 몰래 숨어서 만화책과 무협지를 읽던 고등학교 시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과연 뉴미디어의 ‘이야기’를 탐닉하는 것은 부끄러운 취향인 것일까? 이미 문화 시장에서는 디지털·영상 미디어의 기술 혁신과 대중화로 인해 서사물의 중심축이 종이 매체에서 온라인 영상 매체로 이동한 지 오래이다. 넷플릭스와 AppleTV+, 디즈니+ 등은 이야기의 세계화를 앞당기고 있다. 학생들도 『무정』 보다는 「무빙」, 「재벌집 막내아들」, 「사내맞선」, 「마스크걸」 등의 웹소설 및 웹툰과 그것을 시나리오로 한 OTT물에 더욱 익숙하다.

밤에는 막 업로드된 웹소설과 웹툰을 즐기는 선생과 학생들이 낮에는 시치미를 떼고 진지한 표정으로 『무정』을 토론하는 것이 우리 시대 대학 강의실의 풍경이다. 이 낮과 밤의 자아의 분열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뉴미디어 시대의 대중 서사들을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저열한 것으로 취급하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웹 서사물은 희망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꿈꾸는 지금-여기의 대중의 욕망을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이른바 ‘본격문학’ 작품 이상으로 날카로운 사회적 비판의식이 내재해 있다. 현실의 세계가 연재되던 소설로 변한 이후 그 유일한 독자가 새로운 세계를 헤쳐가는 이야기인 「전지적 독자시점」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규범과 모랄, 가치들을 낯설게 만들고 심문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유의 계기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강의실에서 가르쳐 왔던 바로 그 근대소설이 해 오던 일이 아니었던가?

정종현 한국어문학과 교수  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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