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 하나는 70년대 후반에 있었던 한 선거 때 일입니다. 대학 써클 선배들과 함께 모내기 돕기 봄 농촌활동을 나갔던 날이었는데, 동네 방송이 투표를 무지막지하게 강권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정신적·육체적으로 시달렸던 기억입니다. 마을 한 가운데 세워져 있던 스피커에서 연거푸 터져 나왔던 투표 독려 방송으로 머리가 다 지근거리고 아플 지경이었죠. 오후쯤에서는 아예 마을의 이장이란 분이 몇 차례 오셔서는, 학생들은 투표했냐며 안했으면 이 일 집어치우고 빨리 가서 투표하라고 성화였습니다.

대학 2학년 때인 1978년 5월쯤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은 바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제2대 대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란 유신헌법을 근거로 영구집권을 획책했던 박정희정권의 대통령 간접선거 기관이었죠. 3천 여 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선발해서 이들로 하여금 통일정책 등 국가의 주요정책을 결정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실제 목적은 바로 독재정권의 영구집권 수단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대의원을 뽑는 이 날은 당연히 휴일이었고 저희들은 도저히 이러한 선거에 동참할 수 없는 형편(?)이었죠. 아니 이러한 정치일정에 동원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투표를 근원적으로 피할 겸해서 가까운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의 일손을 돕기로 했던 것입니다.

또 제게 ‘선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1987년 겨울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입니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권력으로부터 직선제를 쟁취한 후 처음 실시했던 선거였죠. 그런데 양 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과 이들의 동시 출마로 민주정부 수립이란 국민의 열망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학생운동에 이어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저는 그 시기 양 김의 출마로 인한 민주화 운동권의 분열과 혼란, 이로 인한 정치적 선택의 괴로움을 고스란히 아픔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5년 후 1992년 대선 때도 이와 비슷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양 김 가운데 한 김이 독재 권력의 뿌리와 한패가 되어 권력을 추구하는 형국이었고,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다른 한 김은 홀로 새 정권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과는 뻔했고, 제겐 이 두 대선이 모두 아프고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투표가 있게 됩니다. 사전선거제라는 게 도입되어 선거일 이전에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선거라는 정치 참여가 훨씬 쉬워진 것이죠. 그러나 전문가들은 투표율이 이번에도 낮아질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쉽고도 근원적인 시민들의 정치활동인 선거참여와 투표행위가 그 참여방식은 쉬워졌지만, 이에 대한 국민들의 열기는 고사하고 소박한 관심과 참여조차 오히려 저조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저희 집에서도 선거를 두고 요즘 신경전(?)이 한창입니다. 팔십대 중반의 아버지는 여전히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일 종편을 끼고 계시면서도 겉으로는 이번 선거에 참여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연막을 피우고 있죠. 아내는 그나마 지지하는 당이 있어 다행이라면서도 정작 찍을 사람이 없어 고민이라 하소연입니다. 문제는 이십대 중후반의 제 두 아이들인데, 좀체로 선거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는 모습입니다.

투표행위가 정치적 의사표현의 전부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선거라는 정치과정을 통해 국민을 대표하는 대의기관이 결정되고 그 기관의 면면과 내용이 개인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정치공학의 부정적 폐해와 선거가 갖는 ‘그들만의 리그’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외면해선 안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이번 투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상식이 정치공학의 폐해를 딛고 균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길 기대해 봅니다. 정치와 정치공학 사이에서.

이용식  인천발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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