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유신독재가 판치던 시절에 김지하는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라고 애절하게 읊은 바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앙고백이랄까, 청년들 사이에 노래로도 불린 그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그럴싸한 수사로 포장된 압제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흔히 긍정적 가치로 공인되는 ‘자유’, 이 수식은 어떨까?

실은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떠들썩한 쟁점이 되고 있다. 개정 역사교과 교육과정의 표기와 관련하여 기존의 ‘민주주의’를 그것으로 바꿈에 따라 일부 국정감사 활동이 일주일 지연되는 등의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용어 변경에 찬성 측에서는 우리 국가의 정체성, 체제적 우월성, 반공ㆍ안보의 이념적 가치 등을 강조하고 효과적인 후세 교육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로의 변경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우리 헌법을 그 근거로서 인용, 제시하고 있다. 주무부서인 교육과학기술부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에 입각”한 것으로, “우리나라 헌법 전문 및 총강에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헌법의 기본 이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정치학, 법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제4조)와 민주적 기본질서(제8조)는 곧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것, 자유민주주의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헌법 규정(119조)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라는 등의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한 논리와 객관적 해석에 기초한 것인가?

우리 헌법에 ‘자유민주주의’는 없으며, ‘민주주의’는 딱 한번 나오는데(제32조 ①) ‘자유민주주의’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극히 미미하다. 그렇다면 두 차례 등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과연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충분히 추론될 수 있는가? 433개 글자로 된 단문 형식의 「전문」에서 그것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는 것 등의 필요조건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 제4조에서는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함에 있어 바탕 혹은 틀로서의 의미가 부여된다. 이렇게 볼 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헌법의 기본 이념으로 간주하거나 자유민주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문제의 용어 변경이 헌법 정신에 입각한 것이라는 설명도, 그 정신을 고도의 포용성을 지닌 추상적 개념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약하다. 한편 제8조의 ④에 유일하게 나오는 ‘민주적 기본질서’는 정당의 목적ㆍ활동의 사법적 준수 의무로서 제시되었을 뿐이고, 경제 관계 법령인 제119조의 경우도 자유민주주의와의 ‘완전한 일치’와는 거리가 있다. 결국 새 교육과정 역사교과 부분의 표기와 관련하여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는 근거를 우리 헌법에서 구하는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은 셈이다.

조석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요즘, ‘민주주의’가 뜬금없이 고생이다. ‘자유’도 덩달아 본의 아니게 피곤할 것이다. 지난날 김지하가 시대의 고뇌와 갈망을 담아 ‘만세’를 외쳤던 민주주의,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이 혹시 도지는 일은 없겠지. 이런 소심한 생각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윤승준 인문학부 교수  inh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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