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발에 딱 맞는 고무신을 신어본 적이 없다. 타이어를 녹여 만들었다는, 그래서 잘 뚫어지고 잘 갈라지는, 그래서 값이 헐할 수밖에 없는, 그 검정 고무신에 대한 추억은 늘 헐렁하기만 하다. 검정 고무신에도 어김없이 문수(文數)가 있어 그 문수만 정확히 기억한다면 그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고무신의 문수가 만드는 곳에 따라 들쭉날쭉하다며 지푸라기를 내 발에 딱 맞게 끊어 장에 가서 검정 고무신을 사오셨다. 그런데도 고무신은 늘 내 발보다 한 문 정도가 컸고 매번 그 헐렁거리는 신발에 짜증이 났다.
어린 깜냥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발이 그리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닌데, 발이 그 신발을 채울 만큼 될 때는 이미 뚫어지고 찢어져서 못 신게 되는데 늘 헐렁한 검정 고무신을 신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신발뿐 아니라 옷도 마찬가지였다. 늘 헐렁거리는 옷을 두어 번 접어 입어야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도 아니면서 싸구려 고무신도 값싼 옷도 몸에 딱 맞춰 사 주지 않는 것이 슬프기만 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비로소 어머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 크기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성장이 멈춘 것이 확인된 스무 살 무렵 신발과 옷을 고르는 권한과 그 값을 내게 건네는 어머니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아뿔싸! 한두 치수 큰 신발과 옷을 사도 무럭무럭 큰 몸이 그 치수를 따라잡고, 또 앞지르는 것을 보는 큰 기쁨을 어머니는 잃으신 것이었다. 검정 고무신이 헐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곧 작아질 신발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내가 빨리 자라 그 신발을 꽉 채우기를 바라는 기대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큰 옷을 사서 허수아비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튼실하고도 빨리 그 옷보다 웃자라기를 바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새 학기에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어떤 신발과 옷을 준비해야 하나 늘 망설이게 된다. 치수에 딱 맞게 표준화된 신발을 준비한다면 모두를 두루뭉술하게 만족시킬 수 있을 듯도 하다. 새로 산 교복의 길이를 줄이고 통을 좁혀 몸에 딱 맞춘 것처럼 옷을 준비한다면 하나하나를 꼭 집어 만족시킬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러나 모두에게 헐겁고 버거운 줄 알면서도 버릇처럼 큰 신발과 옷을 준비하게 된다. '우리 학교'의 '우리 학생들'을 맡게 되면서부터 더더욱 큰 신발과 옷을 준비하게 된다.
한없이 가벼워져가는 세태에 맞춰 표준화된, 규격화된, 틀에 맞는 강의를 준비하면 나도 편하고 학생들도 편할 듯하다. 편하게 공부하고 학점은 잘 받을 과목을 선택하여 남는 시간에 영어 공부, 공무원시험 준비, 임용고사, 각종 전문대학원 시험에 매달리고자 하는 학생들의 요구에 맞게 강의는 헐하고 학점은 후하게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학생들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며, 재미있고 쉽게 해야 학생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고 자위하며 눈높이를 바닥까지 낮추는 것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나와 학생들이 있는 곳이 '대학'임을 생각하면 표준은 폭력이고 맞춤은 감옥일 뿐이다.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수 있는데 표준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지나간 삶의 궤적이 다양하고 앞날의 가능성이 무한한데 맞춤이 강요된다면 그것은 감옥일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더 크고, 넓고, 깊게 공부하지 않으면 다시는 그럴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눈높이를 한없이 낮추는 것은 대학이 해 나가야 할 일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겁고 헐거워 신발을 질질 끌더라도 그 신발에 맞추어 무한히 성장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대학의 참모습일 것이다. 큰 옷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장해 큰 옷을 맞춤옷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봄을 맞아 딸아이의 운동화를 한 켤레 샀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두 치수나 큰 운동화를 샀다. 볼이 넓어 신기 편하고 앞코에 여유가 많아 발가락이 자유롭게 놀아 좋단다. 나를 키운 부모님이나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봄날이다.

한 성 우 교수 (한국어문학)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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