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스크린에 영어 강의노트가 띄워져 있는 가운데 교수의 입에서는 영어만 나온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2시간의 수업 내내 한 번도 질문하지 않는다. 주요 대학들이 속속 영어강의를 도입하면서 상아탑은 ‘조용한 교실'로 변하고 있다. 2006년 11월6일자 헤럴드경제신문 기사에 실린 서울 모대학 경제학부 전공과목 영어강의 풍경이다.
 원어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다. 전공과 원어(대부분의 경우 영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의욕파,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방식으로 학점이 주어지는 원어강의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보려는 학점관리파, 기존의 강의와는 무언가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원어강의를 신청한 낭만(?)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졸업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다른 과목선택의 여지가 없어 원어강의를 수강하게 된 강제수강파. 이렇듯 다양한 필요와 요구로 강의실에 모여든 학생들이지만, 막상 강의를 시작해 보면 강의실 풍경은 앞서 신문기사에서 묘사된 ‘조용한 교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그야말로 ‘참을수 없는 침묵의 무거움’ 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학생이 아닌 교수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원어강의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지만,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유학을 시작하여 영어실력에 비해 의욕이 앞섰던 A선배. 발음도 엉망이고 문법도 틀리기 일쑤였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질문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토론에 참여할 때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거나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싶으면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과격한 습관 때문에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장군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비록 유학기간 내내 선배의 영어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수업에 대한 열의와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내세울 줄 아는 자신감은 미국인 교수와 학생들의 인정(respect)을 받기에 충분했고, 질문의 내용보다 형식과 체면에 얽매여 수업중에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던 필자를 비롯한 다른 여러 유학생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한국인들끼리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낯선 미국땅에서 영어수업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난 1년간 원어강의를 진행하며 거친 시행착오들을 돌이켜보면, ‘조용한교실’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원어강의를 열심히 듣다보면 언젠가 영어가 늘겠지. 아직은 영어에 자신이 없으니 질문이나 토론은 나중으로 미루어야지” 라는 학생들의 막연한 기대심리 혹은 자신감의 결여가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가 혼자 힘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기까지 무수히 주저앉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듯이, 문법적으로 허술하고 발음은 좀 우습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없이 단순히 영어로 된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어느 순간 ‘귀가 뚫리고 말문이 터지는’ 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국제화 시대에 걸맞은 글로벌 인재의 육성’ 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주요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원어강의를 확대하면서 대학을 졸업하려면 전공에 따라 적게는 1-2과목, 많게는 18과목에 이르는 원어강의를 피해갈 수 없는 추세다. 교수와 동료학생들 앞에서 실수하는 것이 두려워서 침묵을 지키는 학생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학생. 한 학기가 지난 뒤 두 사람이 받은 학점의 차이는 미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학 4년이 지나고 취업을 위한 영어인터뷰를 마쳤을 때, 혹은 훗날 직장에서 외국바이어와의 중요한 상담을 마쳤을 때, 두 사람이 받게 될 평가는 과연 어떠할까?

이 지 연 교수(교육학과)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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