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시(詩)선] 사람의 재료

오늘은 약속에 나가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왜 오지 않는 거냐고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황급히 일어나 간판을 다시금 확인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앉았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이 바다의 물을 다 퍼서 다른 바다로 옮기는 일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라 가능했다고 믿었다

 

꽃이 꽃을 꺽는다거나

비가 비를 마시게 된다는 식의 일들

우정의 모든 사랑이라든가

그로 인해 어제는 가볍지 않았다는 기록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대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만으로

이제 감각도 없는 굳은살들을 떼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재료들 사이에서

무조건 속의 조건들을 골라낼 줄 알게 된다면

 

저편에 또다른 나 하나가 생성된다는

잔인한 가정을 믿기로 한다면

정말이지 누군가에게 무언가라도 되어야겠는데

 

오늘 한 일이라곤

약속에 나가 감히 다른 자리에 앉아 있다 온 거였다

 

출처: 이병률(저자), 사람의 재료(시 제목), 바다는 잘 있습니다(시집 제목), 2023년 6월 14일(연도), 문학과지성사(출판사)

 

[기자의 시선] 좋은 사람 되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지치고, 질린다. 그럼에도 다시, 사람이기에 사람을 만난다. 피할 수 없다면, 시인의 말대로 ‘정말이지 누군가에게 무언가라도 되어야겠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도 되지 못한 채, 내가 필요 없다고 느껴지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롭다. 사람의 재료가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 두려움을 시는 포착한 듯하다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시의 화자와 같이 잔뜩 움츠러들고 말았다. 마음은 주는 만큼 돌아오지도 않거니와, 되려 상처받기가 더 쉬움이 그 이유다. 뭔가 되기도 힘들고, 그렇기에 사람을 만나도 외로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속이 조건을 골라낼 수 있는가.

‘오늘 한 일이라곤 / 약속에 나가 감히 다른 자리에 앉아 있다 온 거였다’ (完)

박재형 편집국장  qkrwogud0@inha.edu

<저작권자 © 인하프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재형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