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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하의 ‘애국’과 ‘청년’은 어떻게 사라졌나?21세기 학생자치사 1부

새천년을 코앞에 둔 1998년 11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 후문가는 유권자의 ‘한 표’를 구걸하는 운동원들로 시끌벅적했다. 차기 총학생회에 도전장을 내민 두 팀의 선거운동본부는 저마다 단체복을 맞춰 입고, 최신 가요에 따라 춤을 추며 학생들의 눈길을 끌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보조 운동원들의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후보자들 역시 확성기를 입에 대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이들 사이를 흘깃 스쳐 지나가는 시선은 무심함을 넘어 싸늘하기까지 했다. 한쪽에선 ‘민족해방’을, 다른 한쪽에선 ‘민중민주’를 외쳤지만, 학생들은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온 대학가를 휩쓸던 시절, ‘열사’라는 호칭이 젊은이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던 바로 그 시절은 가고 없어진 지 오래인 듯했다. 결국 그 해 선거는 투표율이 정족수에 못 미쳐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무산으로 마무리된다.

춤을 추며 학생들의 관심을 끌려는 선거운동원 1998년.

 

쇠퇴하는 전국 학생운동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전국 대학에서는 사회주의에 입각한 학생운동 진영(이른바 ‘운동권’)이 학생자치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97년 무렵을 기점으로 전국 학생운동은 그 기세가 크게 꺾이고 만다. 한국대학신문에 따르면 1996년 65%를 차지하던 운동권 총학생회 비율은 △97년 53.1%, △98년 42.1%, △99년 32.3%로 가파르게 감소한다. 87년 민주화와 92년 문민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건재하던 학생운동이 97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세력이 감소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지목된다.

결정적인 요인은 학생운동의 도덕적 실추다. 1996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이 연세대학교에서 ‘8.15 범민족대회’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정면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훗날 ‘연세대 사태’ 혹은 ‘한총련 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학생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잃는데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기억된다. 사태의 책임소재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대치 과정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보인 폭력적인 행태가 취재진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면서 운동권 학생회는 국민적인 지지를 상실한다. 이듬해인 97년에는 한총련 간부들이 한양대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이석(李石, 향년 23세) 씨를 경찰의 프락치로 몰아 장시간 구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한총련 측이 조직적으로 해당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악화일로를 겪는다.

여기에 97년 11월 촉발된 외환위기로 대학생들이 받는 취업 압박이 심해지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학생이 급격히 줄어든다.

본지 수습기자가 남긴 일기장. 1997년.

 

학생운동의 주요 개념들

이쯤에서 몇 가지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0년대 말~2000년대 인하대학교 학생운동 세력은 크게 민족해방파(National Liberation, 이하 NL)와 민중민주파(Public Democracy, 이하 PD)’라는 두 가지 정파로 나뉘어 있었다. 깊게 파고들면 이들 사이에서도 세부 정파가 갈리기는 하지만, 인하대 학생사회에서는 NL과 PD 사이의 대립이 가장 주요한 균열이었다.

두 정파는 “민중은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지만, ‘누가 기득권인가?’에 있어서는 견해차가 있었다. NL은 한국 사회를 ‘미국에 종속된 식민지’로 규정했으며, 한국의 정치인이나 재벌은 ‘단지 미국의 앞잡이일 뿐’이라고 봤다. 따라서 NL은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대항해서’ 투쟁을 벌여야 하며, 이를 위해 같은 민족인 북한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PD는 한국 사회가 외부 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이며, 한국은 고유한 ‘계급문제(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지배-억압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PD는 학생운동 진영이 무작정 반미(反美)를 외칠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계급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의식이 다른 만큼 NL과 PD는 활동 양상도 달랐다. NL은 ‘미 제국주의 타도’라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한 목적을 공유하기 때문에 전국 지도자에서부터 일선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강한 결속력으로 뭉치는 편이다. 반면 PD는 ‘계급문제(혹은 노동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운동가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로 존재했다. 80년대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심 이론으로 기능했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PD는 이론적 구심점마저 상실한다. 자연스럽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처럼 전국 연합 조직에서도 전국적인 단합력을 유지한 NL이 주류를 이뤘다.

NL과 PD는 ‘학생운동’이라는 공통 범주로 묶이곤 하지만 실제로는 총학생회 사업권을 두고 경쟁ᆞ대립하는 관계였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치열한 선거 경쟁을 벌였다. 인하대에서 NL은 ‘애국인하’, PD는 ‘청년인하’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어느 정파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새내기 새로배움터에서 가르치는 FM 구호가 달라지기도 했다. 다만 PD가 2005년을 마지막으로 총학생회 집권에 실패하면서, ‘청년인하’라는 구호는 역사 속으로 잊히고 말았다.

선거운동을 벌이는 '청년인하' 선거운동본부. 2000년.

 

몰락하는 청년인하

1990년대 인하대 학생자치에서는 ‘청년인하 강세 구도’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992~93년, 1996년을 제외한 90년대 전체에 걸쳐 청년인하 계열 인물이 총학생회를 차지한 바 있다. 1997년, 한 석사과정 재학생이 교지 『仁荷』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80년대 후반 인천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발전함에 따라, 기존 NL 세력 중 일부가 PD로 전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애국인하는 전대협, 한총련과 같은 전국적인 네트워크 조직의 후원을 받아야 간신히 청년인하와 세력을 견줄 수 있는 수준으로 세력이 쪼그라든다. 애국인하에 비해 정치적 스펙트럼이 훨씬 넓음에도, 청년인하는 90년대 기간 동안 특별한 분열 없이 안정적으로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청년인하가 21세기에 들어서는 한 차례(2005년)밖에 집권하지 못할 정도로 급격하게 세력이 약해진다. 정파 관련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건 한동안 학생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이유로 청년인하가 몰락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 낼 수는 있다.

우선 90년대 중반 시점에 총학생회 후보자의 정치 성향은 선거에서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본교 정치외교학과 정영태 교수가 1995년 실시한 「총학생회장 선거를 통해 본 학생들의 의식」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 1,085명 중 후보자의 정치 성향을 보고 투표한 학생은 15.2%에 불과했다. 61.5%의 학생은 공약 정책을 보고 투표했다고 답했다. 관심 있는 공약을 묻는 질문엔 40.1%가 학생복지시설, 20.8%가 학문적 분위기, 19.0%가 학교 이미지 제고라고 밝혔으며 학생운동(정치) 관련 공약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1.8%뿐이었다. 90년대 후반에도 청년인하가 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생들이 PD를 지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축적해 온 선거 노하우와 세력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정책적 선호를 충족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9년까지 청년인하는 선거에 단일 후보를 공천할 수 있을 정도의 단합력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애초부터 견고한 조직력을 갖춘 집단이 아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만한 중심 이데올로기를 마련하지 못한 청년인하는 “(PD의 관점에서) 소시민적인 통일운동보다, 실제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느슨한 강령으로 뭉쳐있을 뿐이었다. 청년인하 운동가들은 그람시(A. Gramsi)나 알튀세르(L. Althusser) 같은 난해한 철학 이론에 몰두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등록금 동결과 같은 학생들의 요구 사항에도 부응해야 하는 이중 난제에 봉착한다.

반면 애국인하는 ‘미 제국주의 타도, 민족단결’이라는 단순한 구호 아래 단결된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전국연합에서 개별 학과까지, 엄격한 상명하복에 따른 조직을 갖춘 NL은 일사불란한 행동력으로 인하대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을 운동에 끌어들이는 데도 복잡한 사상체계를 가진 PD보다는 친숙한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세우는 NL이 더욱 유리했다. 이러한 이점을 바탕으로 애국인하는 1999년, 가장 많은 학생 수를 가진 공대 학생회 선거에서 무려 57%의 지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애국인하는 가파른 지지율 상승에 힘입어 1999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4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다. 마침내 밝아온 2000년, 총학생회 사업권을 장악한 애국인하는 공세적인 등록금납부연기운동을 통해 세력을 불린 반면, PD 계열은 단일 후보조차 추대하지 못한 채 ‘청년인하’와 청년좌파’로 분열하고 만다. 총학생회 사업권을 차지한 애국인하는 해가 가면 갈수록 신규 학생 유치에서 이점을 얻으며 대세를 굳히는 데 성공했고, PD는 문과대와 경상대(경제학과, 국제통상학과) 등 일부 단대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점거농성중인 본관. 2000년.

 

등록금 동결을 위한 ‘개나리투쟁’

97년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학생운동이 힘을 잃으면서, 인하대에서도 전체 사회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정통’ 학생운동은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에 본교 운동가들은 사회정치적 운동보다는, 본교의 모기업인 한진그룹에 대항한 ‘교육투쟁’에 힘을 쓴다. ‘민주적 총장 선출’, ‘김영규 교수(당시 교협 의장) 파면 반대’ 등 여러 현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이슈는 역시 ‘등록금투쟁’이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학교 측의 재정 상황과 학생들의 경제 사정은 모두 악화했다. 학교 측은 물가인상을 이유로 매년 10%에 가까운 등록금 인상률을 발표했지만, 외환위기로 가계경제에 어려움을 겪던 학생들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처사였다. 경향신문의 2002년 보도에 따르면 1996년에서 2000년 사이 가계지출에서 가장 큰 폭으로 상승한 부문은 다름 아닌 ‘교육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교의 급격한 등록금 인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운동권 지도자들은 ‘등록금투쟁(등투)’이야말로 학생운동이 추구하는 대의와 학생들의 관심사를 적절히 조화시킬 방안이라고 믿었다. 정파를 막론하고 당시 학생운동가들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사회 변혁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해 내는 것’에 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향을 지향하는 운동가들에게 등록금 인상 문제는 “정부와 재단이 교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고, 서민 학생에게 교육비 부담을 떠미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 비싼 등록금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도 상당했기 때문에 운동가들은 등록금 이슈를 ‘반(反)신자유주의 움직임’을 구축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주제로 여겼다. 이런 이유로 운동권 학생회는 다른 어떤 이슈보다 등록금 인상 문제에 역량과 관심을 집중했다.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자치기구들은 매년 집회, 삭발, 단식, 본관 점거 농성 등 강경한 등록금 인상 반대운동을 펼쳤다. 정부 정책에 따라 등록금이 동결된 2009년까지는 등록금 동결이, ‘반값 등록금’이라는 구호가 화제였던 2009년에서 2011년까지는 등록금 인하가 주된 요구사항이었다. 2000년대에 걸쳐 전국 대학에서 지속된 등록금 인상 반대운동이 등록금을 일괄 동결한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러나 매년 총학생회 주요 공약에 ‘등록금 동결’이 포함돼 있음에도 고액인상, 소액환불 패턴이 반복되면서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는 점차 떨어져 갔다.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당시 등록금투쟁은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새로 취임한 총학생회는 등록금 인상을 저지하겠다며 온갖 투쟁 방법을 동원하다가, 5월 무렵이 되면 자치기구 임원과 지지하는 학생들 모두 기력이 소진해 ‘인상분 일부 반환’에 마지못해 합의했다. 정작 차기 연도 예산안을 결정하는 연말이 되면 선거에 열중하느라 학교와 협상하는 데 소홀해지기 일쑤였다. 선거 결과가 나올 때쯤에는 학교의 수입•지출 계획이 이미 확정돼 있기에 그때 와서 등록금 협상을 해봤자 효과는 미미할 뿐이었다.

2000년대 후반이 될 무렵 ‘등록금투쟁’은 ‘개나리투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개나리가 피는 봄철에 반짝 열을 올렸다가, 개나리가 질 무렵이 되면 함께 사그라든다는 취지에서 생긴 자조적인 별명이었다. ‘등록금투쟁’은 점차 매년 반복되는 연례행사 정도로 자리매김했고, 이를 통해 실제 등록금이 동결되리라는 학생들의 기대도 사라져갔다.

학생회관에서 진행된 개강투쟁 선포식. 2000년

 

잊힌 부조리, 곪아가는 문제들

학생자치기구가 학교본부와의 ‘투쟁’에 전념하는 동안 학생사회 주변부에서는 여러 문제가 곪아가고 있었다. 대학생 대부분이 진보 성향이던 80~90년대와는 달리 2000년대 학생들의 정치 성향은 다양했으며 진보적 학생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과 생활이나 동아리 활동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들은 학생운동에 적극 동조하거나, 별 관심 없이 침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은 ‘튀는’ 행동을 피하고자 속으로만 불만을 삭이고 있었다.

예체능 계열 학과 및 동아리에서 만연했던 구타 및 가혹행위 문제, 불투명하게 운영되는 과 학생자치 문제 등도 중앙자치에서는 의제화되지 못했다. 중앙자치기구 임원들은 등록금 문제에 혈안이 돼 학생사회 내부 문제에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으며, 설령 문제를 인지했더라도 섣불리 개입했다가 학생사회 내에서 일어날 ‘분열’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등록금 동결(인하)’이라는 말뿐인 공약이 되풀이되면서 학생자치에 대한 학우들의 관심은 나날이 식어갔다. 그러나 애국인하를 제외하면 총학생회 출마에 필요한 ‘500명 추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에, 2011년까지 애국인하는 안정적으로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조금씩 세력이 기울어 가면서도 그 존속을 이어가던 ‘애국인하 총학생회’가 급격하게 몰락한 계기는 다소 허망했다. 2011년 4월, 화학생명공학부에 입학한 스물다섯 살 늦깎이 신입생은 인하광장에 생활과학대 새내기 새로배움터 운영진을 비판하는 게시글을 올린다. ‘제국치천’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그 신입생의 이름은 조휘진이었다.

-21세기 학생자치사 2부에서 계속

이기원 기자  qnal44@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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