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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난임 부부들의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 정자은행

평균초혼연령 34세, 합계출산율 1명당 0.8명. 바쁜 일상에 치여 재정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자 결혼은 자연스레 늦춰졌다. 결혼과 함께 초산 연령도 높아지며 난임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특히 남성 난임 인구는 2020년 기준 5년 새 약 47% 늘어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제 난임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10년 뒤 미래일지도 모른다.

난임으로 어려움을 겪는 부부들은 난임 치료를 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남성 난임을 겪는 부부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실패한 후, 수많은 고심 끝에 문을 두드리는 곳이 있다. 난임 부부의 ‘마지막 희망’, 정자은행이다.

정자은행과 정자기증

정자은행이란 정자를 채취한 뒤 동결했다 필요할 때 녹여 사용하는 기관을 말한다. 한국에는 1997년 부산대학교병원에 건립된 이후로 현재 다섯 곳 정도가 운영 중이다. 남성 난임부부가 이곳에 방문하면, 냉동돼 있던 제 3자로부터 기증된 정자를 받아 임신 시술을 받게 된다.

모든 남성 난임 부부들이 정자기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률적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 중 △비가역적인 무정자증으로 판단된 경우 △심각한 유전 질환 또는 염색체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 △기타 정자 공여 시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경우가 정자기증 대상자다. 즉, 자력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임신할 수 없는 남성 난임 부부들이 정자은행을 이용한다.

정자기증 대상자로 분류되기까지 남성 난임 환자는 수많은 검사와 치료를 시도한다. 정액에서 정자가 검출되지 않더라도, 정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그들은 고환을 찢어가며 정자를 찾는 의학적 시술을 거친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정자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마지막으로 정자은행을 찾는다.

이처럼 정자은행과 정자기증은 사회의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자칫 소외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정자기증의 현주소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정자은행은 수요에 비해 턱 없이 적은 기증 수로 현재 운영에 난항을 겪고 있다. 최근 동결 정자 수는 현격히 감소하는 추세다. 그 수는 2017년 90회, 2018년 152회, 2019년 49회 등 등락을 반복하다가 2021년에는 8명의 기증자가 동결 정자를 14회 기증한 것에 그쳤다. 수술 수요자가 연간 500~700명 정도인 것에 대비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정자은행 시스템상, 수증자 부부는 기증자의 인적 사항, 유전 형질 등을 토대로 수증할 정자를 고른다. 주로 훗날 태어날 아이의 심적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남편과 키, 혈액형 등 유전 형질이 같거나 비슷한 기증자를 선호한다. 그러나 기증 정자가 턱 없이 부족해 남편과 유전 형질이 다른 정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언제 그 선택지마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 탓이다. 일례로 남편이 AB형 혈액형을 가진 경우, 부부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유전학적으로 가능한 혈액형을 가지려면 같은 AB형 혈액형 정자를 수증해야 한다. 그러나 AB형 정자는 보관된 양이 현저히 적어, 수증자 부부는 다른 혈액형의 아기가 태어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부족한 정자 수는 수증자의 체력 부담으로도 이어진다. 정자 수증은 시험관 시술과 인공수정 시술로 나뉜다. 정자를 자궁에 주입하는 인공수정과 달리 시험관 시술은 난자를 직접 추출하는 과정이 필요해 수증자에게 상당한 부담이 간다. 하지만 인공수정 시술은 시험관보다 3배 많은 정자가 투입되면서도 성공률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기증 정자 수가 부족한 현 상황에선, 수증자 체력에 부담이 가더라도 효율적인 시험관 시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경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정자기증 부족의 주원인으로 정자기증 문화 미정착을 꼽았다. 그는 “아직 한국에는 정자기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정자은행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여러 오해가 생겨 막연한 걱정을 하는 듯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이미 윤리적, 법적, 의료적 시스템을 모두 마련해 뒀으니, 기증자만 오면 된다고 덧붙였다.

정자기증 과정

그렇다면 정자기증은 어떻게 이뤄질까? 기증 희망자가 처음 정자은행을 방문하면 먼저 기증에 부적합한 사항은 없는지 설문조사와 상담을 진행한다. △정자기증 과거력 △성접촉 관련 사항 △성 전파성 질환(성병) 의심 증상 △유전 질환 △가족력 등이 그 내용이다. 이때, 기관에 따라 기증 희망자는 MBTI나 학력, 직업, 종교 등 몇 가지 인적 사항을 작성하기도 한다. 그 후 1차 검사를 진행해 소변 검사, 정액 검사로 성병 여부와 정자의 활동성, 정자 수 등을 확인한다.

1차 검사 결과에서 기증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1차 정액 기증과 함께 혈액 검사와 신체검사가 진행된다. 이와 더불어 상담을 통해 건넸던 인적 사항을 증명하는 △재학 △졸업 △혼인 △가족관계 증명 등의 여러 증명 서류들을 제출한다. 그 후 기증동의서를 작성하며 2차, 3차 정자기증이 이뤄지고 1차 혈액 검사로부터 6개월 후 2차 혈액 검사와 소변을 통한 성병 균 검사가 진행된다. 최종 검사 결과까지 모두 기증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정자는 동결 단계에 접어든다.

그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이들

수증자 부부가 임신에 성공했을 때, 다른 난임 부부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곤 한다. 일반적으로 아내가 기뻐하는 것과 다르게, 정자기증을 통한 임신이 성공했을 때는 남편이 울면서 담당의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고환을 찢어가며 정자를 찾았음에도 임신에 실패했기에, 심적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고 싶다’ 언뜻 보면 평범한 바람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원이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어려운 선택을 한 그들이 지금처럼 열악한 현실에 차선을 택하지 않도록 많은 관심이 비치길 바란다.

정자기증 팩트체크

“키 180 이상, 명문대 졸업생만 정자기증이 가능하다.” 인터넷에 정자기증을 검색하면 나오는 말이다. 최근 방송인 사유리 씨가 EQ가 높은 서양인의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한 사실이 알려지며 정자기증에 대한 오해는 더욱 퍼졌다. 이에 정자은행을 운영 중인 이경훈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정자은행에 대한 각종 팩트체크를 해봤다.

Q.정자기증은 키와 학력 등 스펙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A. 정자기증 과정에서 정자기증자의 여러 정보를 검사하고 전달받게 되지만 우선시 되는 것은 ‘스펙’이 아니다. 정액 매개 전염 질환의 유무처럼 정액 검사 결과를 통해 정자기증에 적절한 정자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우선된다. 이에 더해 과거 병력, 가족력, 여행 과거력 등에 정자기증에 부적절한 사유가 없으면 기증을 진행하게 된다.

Q. 수증자가 기증자의 인적 사항을 보고 정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들었다. 기증자의 인적사항으로 정자가 평가되는 것은 아닌가?

A. 기증자가 동의한 몇 가지 인적 사항이 수증자에게 전달된다. 이는 수증자 부부가 안전하게 난임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기증자들의 정보는 수증자 부부 남편과 유사한 유전 형질을 갖게 하기 위함이 크다. 예를 들어, 남편이 대머리인 경우 대머리인 기증자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평가될 만한 요소는 키와 학력 정도가 있을 텐데 지금까지는 대부분 비슷한 학력의 남성들이 와서 선호가 갈렸던 경우는 없었고, 정자기증이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 문제되지 않았다.

Q. 기증자에 대한 익명 보호나 훗날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A. 기증자의 정보는 2차 혈액 검사 후 익명화된다. 그래서 누구의 정자인지, 누구에게 보내는지 알 수 없다. 수증자에게 기증자의 정보는 익명화하며,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예외적으로 공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기관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승인받고 정자기증자로부터 정보 제공에 대한 동의를 받아서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훗날 배우자가 기증 사실을 알게 되어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만 연결돼 있을 뿐, 아무 인연도, 관계도 없는 아이이다. 아이의 친권은 수증자 부부에게 있으니 법적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누구일지 모르는 미래의 배우자 때문에 정자기증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건 너무 막연한 걱정이라 생각한다. 정자기증을 한 후에는 기증 사실을 잊고 살아도 된다.

하재윤 기자  jim_ha@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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