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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역사와 추억의 공간, 배다리 마을
배다리 마을의 마스코트이자 헌책방 ‘한미서점’

쫓겨난 조선인의 피난처, 배다리 마을

1883년 개항 이후 조선인들은 외국인들에게 터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특히 개항장이라 더 많은 외지인이 살았던 인천 앞바다 근처 조선인들은 전부 쫓겨났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선택한 곳은 허허벌판 어촌, 배다리 마을이었다. 그때부터 터를 잃은 조선인들이 배다리 마을로 모이면서, 배다리는 동구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1899년 경인철도 개통은 배다리 마을 발전에 불을 지폈다.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던 중심지에 철도라는 교통 이점까지 생기자, 이내 학교와 시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이어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냥 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와 고무, 간장, 술 등을 만드는 공장들이 줄지어 들어오며 산업 시설까지 번성했다.

외국인들이 가득했던 지역을 피해 조선인들끼리 마을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 유구한 역사가 있는 배다리 마을. 그 시절을 겪거나 들었던 주민들은 배다리 마을을 지키고자 갖은 노력을 펼쳤다.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는 다양한 건물들과 주민들이 자리 지키고 있는 배다리 마을에 직접 가봤다.

헌책방 ‘집현전’ 3층 모습

배다리 마을과 사람들

배다리 마을에 가면 ‘배다리 사거리’라 불리는 마을 입구부터 서점들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하나 건너 하나로 헌책방이 모여있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 과거에 비하면 책방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주민들의 추억은 물론 마을 역사까지 담고 있는 헌책방들이 있다.

가장 먼저 목재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서점 ‘집현전’에 들어갔다. 집현전은 이상봉 대표가 운영중인 곳으로 배다리 마을 서점 중 가장 오래됐지만, 외관은 거의 새 건물 같았다. 사실 이곳은 60여 년 전부터 운영했던 1대 사장 이후 사라질 뻔했다. 하지만 책방의 추억을 이어달라는 사장 부부 아들의 부탁을 받아 이 대표가 이어오게 됐다. 이 대표는 마을의 역사와 추억을 담고 있는 헌책방에 더 많은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3개의 층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과 풍경 사진들은 이 대표가 손님들과 공유하는 소중한 추억들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이 대표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직접 촬영한 작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며 “제 작품은 물론, 주민들의 전시를 돕는 공간이 됐다”고 밝혔다. 소소하지만 주민들에게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집현전에서 나와 더 안쪽으로 들어오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간판을 가진 아벨서점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래된 헌책방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많았다. 새로운 해가 시작돼 여든이 넘었다고 신세 한탄을 하며 들어온 할머니는 일본어 책을 찾으며 활짝 웃었다. 한 구석에서는 해외 작가의 소설책을 놓고 어린 손님과 사장님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남녀노소 책의 매력에 푹 빠진 손님들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에 관해서라면 맞장구를 쳐주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니, 마을에서 책방의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점들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알루미늄 마스크를 쓴 깡통 친구가 반겨준다. 인천 문화 양조장, ‘스페이스 빔’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예전엔 양조장이었던 곳이 이제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해 인천의 문화를 양조하는 곳이 됐다. 민운기 대표는 이곳에서 스페이스 빔을 운영하며 초등학생들의 작품 전시부터,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교육까지 마을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민 대표는 배다리 마을의 오래된 주민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 구월동에서 도시 유목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도시에서 텐트를 치고 도시 탐사를 하는 활동이다. 민 대표는 세 번째 프로젝트 장소로 배다리 마을을 선택해 이곳에 오게 됐는데, 그가 목도한 현장은 상상과 많이 달랐다고 전했다. 아픈 역사 속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고 도착했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다. 마을에는 산업 도로 건설을 위한 갖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산업 도로 건설을 위한 공사라니, 평화로웠을 것만 같았던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배다리 마을 과거 모습

배다리 마을의 위기

2000년대 초반, 배다리 마을을 관통하는 지상 도로를 짓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도로는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위치에 건설될 예정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마을이 완전히 분리된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통행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 예상 돼 많은 이들이 반대를 외쳤다.

특히 이 마을의 구성원은 예전부터 함께 지내던 노인들이 대부분으로, 그들은 삶의 터전이 분단된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배다리 마을 주민들은 수 차례 지자체와 협의를 준비했지만 소통이 되지 않았다. 민관 협의라는 이름 아래 지자체와 의견이 비슷한 주민들만 모아 협의를 진행했다. 도통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줄 생각이 전무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주민들은 1인 시위부터 시작해, 도로 건설용 부지로 낙점돼 텅 비어버린 곳을 동산으로 꾸미는 등 밤낮없이 배다리 마을을 지켜왔다.

집현전 이상봉 대표는 원래부터 이 헌책방을 운영한 장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헌책방과 배다리를 향한 마음이 남다르다고 운을 띄웠다. “(배다리 마을) 관통 도로가 생긴다고 했는데, 그것도 마을에 도움 되기는커녕 마을 중간을 딱 끊어놓고 아예 단절시키는 모양새였어요. 결과적으로 땅 위에 짓는 도로는 취소됐죠. 가뜩이나 사람도 별로 없고, 다니던 사람들만 다니는 작은 마을을 고립시켜버리면 어떡해요” 이 대표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관통 도로에 관해 전한 말이다. 책방을 넘겨받은 지 오래되지 않은 본인도 이런 마음이었는데 주민들은 어떻겠냐며 안타까움을 표현한 게 잊히지 않는다.

특히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는 2000년대 초반 시작된 도로 건설 사업에 대해 크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홀로 1인 시위도 진행하며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벌였다. “손님들이 직접 얻고 싶은 책을 찾기 위해 이곳에 방문하는 마음이 좋고, 본인이 원하는 책을 찾았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어요” 곽 대표가 예전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런 곳에 관통 도로를 짓는다는 것은 벽을 지어 마을을 단절시키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에도 벽이 생기게 하는 일이다.

배다리 마을 현재 모습

값어치보다 가치

결국 인천시는 배다리 관통 도로를 지상 건설이 아닌 지하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마을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지자체에 닿은 것은 물론 마을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인천 사람들은 배다리 마을에 대해 역사적 가치가 큰 마을이라며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개항 이후 외지인들이 점령했던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모여 살며 아무것도 없던 땅을 동구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만든 역사적 가치를 가진 ‘배다리 마을’.

배다리 마을뿐 아니라 어느 지역이든, 마을 주민들의 추억과 삶의 터전이 파괴된다면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마을을 마냥 발전 시켜 수익을 창출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추억을 기억해야 한다. 문명과 기술의 발달 속도에 맞는 빠른 발전도 좋지만, 원도심의 정체성과 가치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장민서 기자  judy73jh@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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