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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춘천 참사 10주기, 그날을 기억합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2011년 7월 31일, 인하대학교 운동장이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직 세상 떠나긴 이른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의 비통함을 하늘도 아는지, 구슬픈 비가 내렸다.

“고난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꿈을 향해 노력한 10명의 고귀한 학생들을 존경과 사랑으로 떠나보냅니다. 얼마나 숭고한 청춘이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았는지 우리 모두 마음에 새기고 기릴 것입니다.” 뒤이어 이본수 총장이 “김유라 양, 김유신 군, 김재현 군…” 10명의 학생을 일일이 거명하자 영결식장은 다시 한번 통곡의 장으로 변했다.

가족만이 슬픔에 빠진 건 아니었다. 동고동락했던 친구들, 그들의 스승인 교수들, 그리고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했던 선후배, 교직원, 동문, 그날 영결식에는 1,500여 명이 슬픔을 함께했다.

10년 전 봉사활동이 진행된 발명교실

10명의 선생님

2011년 7월 25일, 강원도 춘천 상천초등학교로 향하는 인하대 버스에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이 올랐다. 중앙동아리 ‘아이디어뱅크’ 소속 학생들이다. 아이디어뱅크는 매년 ‘발명캠프’라는 이름으로 과학 교육봉사를 진행해 왔다.

상천초에 도착한 이들은 교장 선생님과 간단히 인사한 후, 과학실험 자재들을 내리고 다음 날 있을 수업을 위해 리허설을 했다. 다음날, 수업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그들은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자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복층으로 돼 있었다. 1층에선 신입생들의 첫 수업을 자축하는 자리가, 2층에선 앞으로의 계획을 논하는 동아리 집행부의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가 한창이던 7월 26일 밤, 산림청은 춘천시에 산사태 주의보를 내렸다. 20시부터 내렸던 집중호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박에 묵던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7일 새벽, 마적산 정상에서 1차로 흙이 쓸려 내려왔다. 2차 산사태까지 10여 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대피하지 못했다. 자택에서 쉬고 있던 민박 주인이 연락 한 번 했다면 피할 수 있는 참사였다. 흙은 삽시간에 민박을 덮쳤다. 민박 1층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조립식 패널에 벽돌을 쌓은 벽이었다.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2층에 있던 사람들은 그나마 무사했지만, 뼈대만 남기고 사라진 1층에선 구조가 한창이었다.

“티비에 인천 모 대학이라 나오더라고요. 우리 애들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느낌이 팍 오더라고요. 다시 가서 봤지요. 그랬더니 인하대학교로 나왔어요. 근데 얘가 춘천 간다고 얘기한 게 기억이 나더라고요.” 자녀의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황망했다. 그렇게 타지로 교육봉사를 떠난 10명의 선생님은 지상에 꿈을 남긴 채 떠났다. 막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 여섯 명이었다.

정경원(故 최민하 어머니) 씨는 당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비가 오긴 했는데, 사고가 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죠. 그러다 새벽에 민하 외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뉴스를 보니까 춘천에서 인하대 학생들이 죽었다더라. 티비를 틀었더니 ‘채민하’라고 이름이 잘못 뜨더라고요. 근데 비슷한 이름이야 우리 아이랑.”

본교 2호관 앞 추모비

“특별한 일 없이 살아요”  

5월 23일 어느 오후, 故 최민하(생활과학부·1)의 어머니 정경원 씨와 아버지 최영도 씨, 그리고 왕의조(당시 동아리연합회장) 씨를 정 씨의 자택에서 만났다. 왕의조 씨는 우연히 정경원 부부의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막역한 사이로 지내는 듯 보였다. 세 명은 기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경원 씨는 “곳곳에서 다 왔지만, 인하대에서 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냐는 기자의 물음에 최영도 씨는 ‘특별한 일은 없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정경원 씨도 예전에 비해 많이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부족하긴 하지만,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기 때문에 마음이 덜 힘들어요.”

유가족들은 코로나 이전까진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선 정경원 씨도, 최영도 씨도 민하 엄마, 민하 아빠가 된다. “거기가 우리 애들 이름이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모임이에요. 거기선 아직도 민하 엄마니까.” 그리고 서로 경조사가 있다면 자주 참석한다고 했다. 떠난 자녀의 형제·자매들은 벌써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나서 그들은 그날 이후 유가족들이 어떻게 사건을 정리해왔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이겨낸 슬픔

산사태 직후, 유가족들은 대책위를 꾸렸다. 춘천시에선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건 아래 진조위는 난항을 겪었다. 거기에 유가족들 마음에 비수를 꽂는 춘천시장의 망언이 더해지자 진조위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시장이 ‘춘천사람도 아닌데 춘천에서 돈을 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어떻게 시장이 할 수 있나…” 유가족들은 직접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안 그러면 쟤네 자원봉사 한답시고 와서 술 먹다 죽었다고 한다. 그런 얘기 들으면서 애들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유족들은 직접 발이 푹푹 빠지는 마적산을 올랐다. 정상에는 물이 가득 담긴 방공호가 있었다. “꼭대기에 가보니 물이 고여 있는 거야, 군이 철수하면서 안 메꿔서 한 번에 터진 거지.” 마적산에 고인 물이 폭우와 함께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춘천시에도 책임이 있었다. 민박이 위치한 장소는 산림청이 지정한 산사태 위험 1등급 지역이었다. 마적산 일대는 이미 1990년과 1999년에도 산사태가 발생한 적 있는 지역이었다. 춘천시는 그곳에 인허가를 내줬다. 신북읍 주민들은 “죽을 자리를 들어간 거다”라는 반응이었다. 유가족들은 강원도, 인하대, 춘천시, 국방부 등 책임 주체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때론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들은 그런 과정에서 위로받고, 한을 풀었다. 정경원 씨는 “그런 싸움을 통해서 원통함도 풀고, 그 과정에서 치유가 많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학생들이 시기가 왔을 때 춘천 참사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정도만 돼도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과연 춘천 참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학생들이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으로도 그들에겐 위로가 됐다. 왕의조 씨는 “행사가 거창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고민할 수 있는 계기만 만들어진다면 규모와는 상관없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며 “그런 게 진짜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그때와 같은 참사가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지난 4월 최영도씨는 ‘재난·참사 유가족·피해자들의 기록과 증언회’에서 춘천 참사를 이야기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최영도 씨는 심정적으로 그 얘기를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사실 진짜 이야기하기 싫거든요. 그래도 조금이나마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게 도리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가긴 가요.”

상천초등학교 전경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유가족을 만나고 이틀 뒤인 5월 25일, 상천초등학교를 찾았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기자가 학교에 도착하자 멈췄다. 하늘도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한적한 시골길 옆 학교는 평화로웠다. 건물 왼쪽으로는 교사동이, 오른쪽으로는 체육관과 발명교육센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전 그날, 발명캠프 봉사를 떠났던 10명의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곳이었다.

상천초 행정실장은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는 말에 기자가 춘천 출신임을 말하자 “11살이었을 텐데, 그 일이 기억 나시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이 학교에 근무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참사 당시 교육청에서 근무했던 그 날을 회고했다. “도지사부터 시장까지 와서 보고하고, 밤에 소방대부터 민간 다 동원했었죠. 토사물에서 못 나오신 학생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뒤이어 교무부장이 기자를 발명교실로 안내했다. 그러자 10년 전 수업이 이뤄졌던 그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취재하며 찾은 예전 그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그 장소를 둘러보았다. 예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었을 각종 공구들과 실험도구들, 그리고 10년 전에는 없었을 3D 프린터도 몇 대 있었다. 현재 상천초 발명반은 춘천시에서 선발된, 추천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주말과 방과후학교에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상천초 발명교실 내부

건물 옆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공적비가 보였다. 그들의 봉사 정신과 창의 정신을 기리고자 강원도에서 만든 것이었다. 공적비에는 그날 봉사활동을 떠났던 열명의 선생님의 이름이 한자 한자 적혀있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세월 탓이었을까, 글자는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고, 돌은 색이 바랬다. 상천초는 올해 7월 그날이 돌아오기 이전에 보수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라 했다.

하지만 낡아버린 공적비와 달리, 그곳의 사람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발명 교실 아이들은 알죠. 놀이터 앞에 공적비가 있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한 번씩 이야기를 하죠 아이들에게.” 이 실장은 상천초 구성원들이 모두 그 일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여자 선생님은 발명교실을 둘러보고 있던 기자에게 다가와 “혹시 인하대에서 오신 건가요? 저도 그때 정말 마음이 아팠는데…”라며 그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에서 그날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천초 발명교실 앞 공적비

놀이터에서 뛰놀던 두 아이를 만났다. 아이들은 낯선 얼굴을 보자 “선생님은 누구세요?”라고 물었다. 기자라고 답하자 “그럼 저희 TV 나오는 거예요?”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저 공적비를 아는지 묻는 말에 아이들은 “옛날에 어디서 봉사활동 오셨대요!”라며 공적비에 쓰여진, 색바랜 이름을 하나하나 큰 목소리로 읽었다. 그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모두가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2021년 7월 27일은 춘천으로 봉사활동을 떠나 참사를 겪은 10명의 선배님이 떠난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배움과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다 못다 한 꿈을 안고 우리 곁을 떠나신 故 김유신(신소재공학부·11), 최용규(화학공학·10), 이경철(전기전자공학계열·11), 이민성(섬유신소재공학·05), 이정희(컴퓨터정보공학·06), 최민하(생활과학부·11), 김재현(조선해양공학·05), 성명준(생명화학공학부·11), 신슬기(생활과학부·11), 김유라(생활과학부·11) 선배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김범수 기자  kbs@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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