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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누가 죄인인가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세상. 남부러운 것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남들 모르게 열등감과 괴로움 한 가지씩 가지고 있는 세상.

 지독한 세상에 대한 불만과 반항심을 표출하는 이는 여지없이 죄인으로 낙인 찍혀 감방 한구석으로 처박히고 지위와 권위로 남들을 찍어 누르는 이는 부른 배를 문지르며 두 발 뻗고 편히 자는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죄인인가.

 이 사회가 죄인이 죄인을 만드는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묘한 공통점을 가진 소설과 영화를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소설 <죄와 벌>

 러시아 작가 도스트옙스키의 장편 소설 <죄와 벌>은 인간의 내면을 깊은 곳에서부터 탐구한다. 책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다. 돈을 구하기 위해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는데, 악덕 업주가 맘에 들지 않자 고뇌를 거듭한 끝에 그를 살해한다. 이후 살인 현장을 목격한 주인의 이복동생까지 살해한다. 여기까지는 그가 신경질적인 괴짜로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그는 길에서 마차에 깔려 죽은 사람의 유족을 위해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고민도 없이 줘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며 ‘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스콜니코프는 ‘악한 이에게 악한 짓을 하는 것은 올바른 짓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니, 올바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악함을 처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범죄라고 한들 악한 이를 처벌할 능력이 있다면 그 사람을 처단해야 한다고 말이다. 정작 범죄를 저지른 자신은 양심의 감옥에 갇혀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는데 이때 소냐라는 여성을 만나 신에 귀의하게 된다.

 가난함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아왔던 라스콜니코프, 매춘부란 이유로 사회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소냐. 라스콜니코프는 서럽게 울며 소냐의 무릎을 끌어안고 놀란 소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떨면서 그를 바라봤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상처를 줬던 이들이 아닌 비슷한 아픔을 가진 서로의 사랑으로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책이 그려낸 사회 속에서 라스콜니코프와 소냐는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회가 만들어낸 ‘가난’이라는 죄에 억눌려 결국에는 살인을 저지르고, ‘매춘부’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사회에서 격리된다. 그런데 이들이 죄인이 된 배경에는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차별,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아무도 라스콜니코프가 미치광이가 되게끔 만든 사람들에게 ‘죄인’이라 말하지 않는가.

 

영화 <기생충> 포스터

영화 <기생충>

 영화 <기생충>은 세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와이파이도 설치하지 못해 이웃집 인터넷을 몰래 쓰는 반지하 방 기택네. 저택에 거주하는 박 사장네와 그 지하 벙커에 기생충처럼 붙어사는 또 다른 가족. 영화에서 주목할 키워드는 ‘지상과 지하’ 그리고 ‘냄새’다. 지상과 지하로 극명하게 나뉘는 우리 사회가 가진 빈부격차의 모습과 가난의 냄새를 대하는 사람들을 통해 가난한 자를 향한 세상의 차별을 보여준다.

 영화는 반지하 방 기택네 장남 기우가 박 사장의 딸 대입 과외 자리를 맡으며 시작된다. 그는 사람을 잘 믿는 사모님을 속여 동생 기정이를 미술 치료 교사로 채용하게 한다. 이렇게 기우와 기정은 박 사장네에서 ‘기생’한다. 이후 아버지 기택은 박 사장의 운전기사, 어머니 충숙은 가정부가 되며 한 가족이 다른 가족에게 완전히 기생하는 형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두 가족으로 대표되는 계급 구도가 본격화된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박 사장네서 판을 벌여 놀던 기택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충숙으로 인해 해고당했던 전 가정부가 집으로 찾아온 것. 이들은 가정부를 집으로 들이고 반지하 방과는 또 다른 지하 벙커에서 ‘지상’의 부자들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정부 가족의 삶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돌아온 박 사장 일가로 인해 기택네는 거실 탁자 밑에 급히 숨어 이들의 대화를 듣는다. ‘기사님은 다 좋은데 ‘냄새’가 나. 퀴퀴한 반지하 냄새.’ 좁은 탁자 아래, 자식들을 옆에 둔 채 숨죽이며 이 대화를 들어야 했던 기택은 분노를 서서히 키워갔다. 그리곤 비 오는 날의 운치를 즐기는 박 사장 가족을 등지고 빗물이 넘치는 집으로 가족들과 함께 맨발로 달려가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운치를 맘껏 즐기는 날이 똥물 넘치는 반지하 집의 물을 퍼다 나르며 좌절감에 빠질 수 있는 날일 수 있다. 너무나도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택네가 ‘죄인’이 되고 이들의 감정이 격정적으로 치닫는 후반부엔 지상에서 지하를 억누르고 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기절한 아들을 옮기면서도 ‘지하’에 사는 이들의 냄새를 역겨워하는 박 사장의 모습에 기택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벌이고 만다.

 ‘죄인’이라 함은 누군가를 죽인다거나 범죄를 저질러야만 되는 것일까. 지상의 누군가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에서 더러운 냄새를 치워버리려는 이들은 죄인이 아닌 것일까.

 

누가 죄인인가

 소설 <죄와 벌>과 영화 <기생충>은 서로 다른 내용 속에서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처절하게 외치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을 옹호하거나 응원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마음이 생겨난다. 이는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만한 도구들이 작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러니까 재료와 특별한 사람들, 즉 자신들의 드높은 처지 덕분에 법률의 구애도 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재료 혹은 쓰레기나 다름없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직접 법률을 만드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죄와 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저 별거 아닌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재료(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들과 특별한 사람들(사회적 지위를 이용 가능한 사람들)이 나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작게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 안에서, 크게는 이 나라와 세계에서. 신분제도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신분이 있다고 가끔 믿곤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맞고 라스콜니코프 혹은 기우와 기정이 같은 나이가 됐을 땐 평범한 사람임에 좌절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별한 사람들과 재료 간 차이에서 누군가는 괴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스스로 죄라 여겨 벌을 내리거나 다른 이를 벌 주곤 한다. 벌을 어떻게 내리는지,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사회는 ‘평등사회’를 주장한다. 모두가 평등하고 ‘가난은 죄가 아니다’ 라는데, 이는 분명히 상대적이다.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죄인처럼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고 또 죄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 또 다른 ‘죄인’이 있다.

엄현수 기자  12172975@in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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