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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담론] 우리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종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종차별의 역사는 1800년대 노예제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데려온 백인이 그들을 노예로 부리며 야만적인 인종으로 취급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현재에 이르러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흑인에 대한 차별뿐만이 아닌 피부색만으로 열등과 우등을 나누는 차별대우를 의미하게 됐다. 이에 우리 동양인 역시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서양으로 여행, 이민, 유학 등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 역시 다름아닌 인종차별이다. 음식은 입에 맞을지, 새로운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뒷전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헛된 고민이 아니며 실제로 우리는 해외에 나가 수많은 인종차별을 당한다. 길을 걸을 때, 물건을 구입할 때, 어디에나 우리에게는 인종차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대놓고 조롱하는 말들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차별들까지 그들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해한다. 우리는 억울함을 느낀다. 피부색이 뭐길래 나는 차별받는 피해자가 돼야 하는가.

 다만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피해자이기만 한가.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 우리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백인에게 당하는 인종차별에 억울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인종차별을 가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인다. 흑인을 특정 단어로 지칭하며 그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동남아시아 출신을 업신여기기도 한다. 무의식 중에 보이는 그들에 대한 시선과 언행들은 우리에게 인종차별을 가하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 단편적으로 교내의 사정만 보더라도 확연히 차별이라고 판단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다.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마저 노골적으로 외국인 학우를 차별하는 시선과 태도를 보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배움의 장이라는 곳에서도 차별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데 학교 밖 사회가 더 나을 리는 만무하다. 결혼이주여성부터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까지 그들의 신분은 중요치 않다. 그저 피부색만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차별 받는 외국인들은 울분을 토하고 우리는 그들의 억울함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인종차별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피부색으로 차별을 당하는 것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무의식 속에서 피부색이라는 가당치도 못한 이유로 또 다른 누군가를 옭아매는 내로남불식의 차별이 너무나도 만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인종차별을 가하기도, 당하기도 하는 이 심리의 기저에는 ‘나만 당할 수 없으니 너도 당해봐라’하는 어처구니 없는 복수심이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인종차별에 적응해 버린 나머지 실제로 인종이 우열을 판단하고 미개함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기이한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가 됐든 인종차별이라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단지 피부색만으로 우열을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미개함이다.

 우리는 문명화를 맹목적으로 좇는다. 피부색만으로 우열을 가리는 ‘그들’이 만든 ‘세련된’ 문화를 떠받들고 문명화를 우등한 것의 상징으로 여긴다. 음식을 먹을 때 수저와 포크를 어디서부터 사용해야 하는지, 악수를 할 때, 누군가를 소개할 때 보여야 하는 매너는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을 교양이라고 판단하고 이러한 행동양식들을 문명화 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역사적 진보의 과정에서 큰 축을 담당한다는 평등에 대한 이해도 없이 ‘문명화’를 논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들은 그저 속이 빈 문명화일 뿐이다.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김선경 기자  12182872@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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