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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그들을 기억하며

 “저는 일본 군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단단히 결심했어요.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엔 나오게 됐어요.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칠십이 다 됐으니 이젠 죽어도 괜찮아.”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다 같이 힘 모아 희망을 잃어버리지 말고 희망을 잡고 삽시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나이는 구십 넷,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영화 ‘김복동’ 포스터 중 [엣나인필름 제공]

외면당했던 진실

 공장에서 군수용품 만든다고, 돈 벌게 해주겠다고. 누군가는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속아 끌려갔다. 아프리카, 일본, 중국, 등 전쟁 중인 세계 각국에 평균 14세 소녀들이 잡혀 왔다. 제대로 된 위생 시설도 없는 더럽고 허름한 막사에서 하루에 적게는 20명, 많게는 40명이 넘는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했다. 혹여나 몸부림치고 거절을 한다면 모진 고문과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장례식 같은 것은 없다. 성병은 흔하게 걸렸고 임신이라도 한다면 강제 중절 수술을 받거나 죽어야 했다. 말 안 듣는 계집애들은 개만도 못하다.“ 이후 일본군은 패전하자 위안소에 있던 여자아이들을 단체로 끌고 가 땅에 묻고 불태워 죽였다. 그럼에도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온 고향 땅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여성이 피해를 보고도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침묵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타인의 시선’. 전쟁이 끝나고 겨우 목숨 걸고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사람들은 ‘더러운 몸’이라며 손가락질했다. 몇 년간 끔찍한 강간 고문을 당하고 돌아온 이들은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돼 사회로부터 2차 피해를 당해야 했다.

 1990년 한국에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설립된 후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자 1990년 6월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멀쩡히 살아있는 증거들이 있는데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범죄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도 외면했던 진실에 그들은 스스로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모른 체 침묵하고 내 나라도 힘이 없으니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침묵했던, 떠오르는 기억에 죽을 것 같아 차라리 잊으려 했던,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을 삼키는 것같이 아팠던 그 순간을 떠올려야 했다.

 그들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뉴스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70세 노인이 있었다. 바로 고(故) 김학순 할머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가장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더 이상 피해자라고 해서 숨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바로 살아있는 증거’라며 어렵게 사람들 앞에 섰다.

 할머니의 증언은 숨어 살던 전 세계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끔 용기를 줬다. 이후 수많은 피해자가 직접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증언했고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은 지금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됐다.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를 내 증언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긴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여성이 홀로 눈물을 삼키며 자신을 숨긴 채 지내야 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던 8월 14일은 그날을 기억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운동을 계승하고자 2012년 제11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결의해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로 지정됐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무수히 많은 어린 영혼들의 삶을 함께 기억하고 기리며 전 세계적으로 일본의 범죄 사실 인정에 대해 촉구할 기회를 만들었다.

 

우리의 목소리, 수요집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고 나서 1년 후,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일본대사관 앞 거리로 모여들었다. 바로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공식 인정•사과•배상을 받기 위해 집회를 시작한 것이다. 수요집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모와 참여 인원이 늘었으며,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매주 수요일에 수요집회를 열고 있다.

 그렇게 꼬박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주 수요일 평화로엔 사람들이 모여든다. 단 한 주도 거르지 않았던 일이다. 100회, 200회, 시간이 흘러 900회, 1,000회, 그리고 2019년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이자 수요집회가 딱 1,400회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전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일본 정부는 사죄하라! 일본 정부는 배상하라!’

 “무엇보다도 나는 ‘위안부’라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니까요. 저희는 위안부가 아니라 강간 피해자들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위안부’피해자 고(故)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의 말이다.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네덜란드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지난달 20일 별세했다. 지난달 21일에 있었던 제1401차 수요집회에서 멀리서 나마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달 28일에도 멈추지 않고 제1402차 수요집회가 열렸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면, 평화를 사랑하고 약자를 존중하는 분들이 되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수요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이어온 집회로서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됐다. 27년, 1400번이 넘도록 소리치고 울부짖는 시간 동안 일본 정부는 단 한 차례도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이제 공식적으로 피해를 증언한 할머니는 단 20명만이 살아남아 있다. 아마 일본 정부는 이들이 모두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는 구십 넷,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1940년 14세였던 어린 김복동은 일본군에게 속아 일본군’위안부’ 위안소로 끌려갔다. 처음 끌려갔던 날을 시작으로 고(故) 김복동 할머니는 이후 8년 동안 중국, 말레이시아, 홍콩, 등 전쟁이 일어나는 곳으로 끌려다니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전후 기적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할머니는 부산에서 아픈 세월을 숨긴 채 갖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힘을 입어 1992년 3월 자신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 이후 할머니는 1993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다. ‘평화의 우리 집’이 건설되고 ‘소녀상’이 설치되는 그 모든 순간을 시민단체들과 함께하며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했다. 처음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지던 그 순간에 김복동 할머니는 제일 먼저 소녀상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이외에도 2012년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하고 전쟁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꾸준히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살아가는 재일교포 아이들을 위해 ‘김복동 장학금재단’을 마련해 기부활동을 이어 갔다. 이후 2015년 암 투병 와중에도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규탄하며 ‘화해•치유재단’의 즉각 해산을 위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1년여 시간 동안 암 투병 끝에 2019년 1월 28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힘없는 팔을 들어 올리며 ‘아베는 사죄하라’고 외쳤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전 세계를 돌며 성노예 피해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던 김복동 할머니는 여성인권운동가•평화인권운동가로서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다. 이젠 남은 사람들이 ‘김복동’이 되어 전 세계에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고 있다.

 

나비의 날개는 꺾이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수요일 낮 열두 시엔 많은 사람이 평화로에 모여든다. 할머니들이 계시지 않은 빈자리는 수많은 단체와 학생들, 시민들이 지키고 있다. 평화 나비 네트워크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의기억연대, 등의 단체들이 할머니들을 후원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껏 이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았던 것일까, 아니면 세계라는 곳이 너무 넓은 곳이었을까. 일본 정부는 전 세계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노력하고 있고 유럽을 비롯한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는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김복동 할머니의 단짝 친구 길원옥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소중한 추억들은 잊히고 끔찍한 기억만이 머릿속에 남은 채 할머니는 여전히 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한다. 그리고 김복동 할머니를 대신해 세계 각국을 돌며 일본군’위안부’피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길원옥 할머니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이옥순 할머니와 함께 여전히 수요일 낮 열두 시, 평화로에 자리한다.

 진심으로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돈 몇 푼 받고 진행했던 철저히 피해자를 배제한 협상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남은 피해자들은 점점 나이를 먹고 남은 힘과 기억을 잃어가지만, 여전히 그들의 날개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말한다. 숨이 끊길 때까지 외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할머니들의 곁에서 함께한다. 소녀상 철거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소녀상을 지키고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씌워주며, 추운 날엔 목도리를 둘러 그 곁을 지킨다.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전 세계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있다. 젊은 영화감독들은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알릴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혹자는 뉴욕 광장 한가운데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일본의 만행을 광고로 올렸다. 진심으로 사죄받는 그 날까지 이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들을 기억할 것이다.

 

외친다. ‘일본 정부는 사죄하라, 일본 정부는 배상하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우리는 언젠가 이길 것이다.

엄현수 기자  12172975@in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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