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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억 속에 남아있던 4•3, 다시 빛을 보다

군인들은 일주 도로변의 옴팡밭에 사람들을 밀어놓고 무차별 총질을 해댔다. 중 낮부터 시작해 저물녘까지 계속된 이 아수라장이 멈춘 것은 대대장 차가 도착하여 총살 중지령을 내고 나서였다. 총질을 멈춘 군인들이 떠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학교 교실에서 밤을 보냈다.” – ‘순이 삼촌’ 인용 -

 제주도 출신 현기영 작가는 대표작 <순이 삼촌>을 통해 오랜 기간 언급이 금기시됐던 제주 4•3사건을 조명하고 문학의 손을 빌려 대중에게 사건을 알리고자 했다. 군사정권은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그를 보안사로 끌고 가 고문했다. 책은 불온서적 판정을 받았지만 작가는 기소되지 않았다. 그가 기소돼 재판에 넘겨지면 4•3사건에 대한 공개적인 조사가 필요했고 정권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제주 4•3평화공원 한구석엔 아이를 안고 웅크린 여자의 조각상이 있다. 25세였던 변병옥은 겨울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던 시기, 토벌대로부터 피신하던 중 자신의 아이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발견된 두 모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각상 ‘비설’이 설치됐다. 눈 더미 속에서 필사적으로 아이를 감싸고 죽어간 어머니의 모습은 그 때의 참상을 방문객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48년, 제주에선 남로당과 군경의 무력충돌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군은 10월 17일 초토화작전을 포고한다.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안선에서 5km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 해안 쪽이 아닌 한라산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인 중산간 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마을을 제때 내려오지 못했다. 포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경과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은 중산간 마을 토벌을 시작했다.

 

눈앞에서 5백 명이 알몸으로 수장된 게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장시영, 당시 군인-

둘째 아들도, 며느리도, 큰아들도 모두 내 눈앞에서 잡혀갔어. 모두 걱정 말라면서 떠나갔는데 아무도 안 돌아와. 아직도 가슴이 가득해오면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와. 너무나 억울해서 나는 몇백 년이고 아들을 다시 보기 전에 죽을 수가 없어.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양은하 어머니(윤희춘)의 증언 -

 초토화 작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마을을 두고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계엄 선포라는 명분 아래 재판 없이 학살당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제주 군경이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고 기록했다. 보고서대로 대량학살이 벌어졌다. 공산 무장대의 은신처와 보급처를 없애기 위해 중산간 마을주민을 강제 이주, 살해하고 마을을 방화했다. 집계된 숫자로 가옥 2만 호, 4만여 동이 소실되고 유래 깊은 중산간 마을 95%가 폐허가 됐다.

 토벌에 참여했던 서청의 만행에 대해 전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서청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는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 명령에도 불구 계속 도주,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 토벌대가 주민의 생살여탈권을 자의적으로 결정했다는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서청의 한 주임은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헌헌법이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돼 사법체계의 대원칙이 마련됐지만 제주도에는 효력이 없었다. 토벌대는 연좌제를 적용해 남로당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의 가족들을 몰살했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건장한 청년은 어느 진영에게든 징병 혹은 총살의 대상이었기에 피신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북촌리는 ‘무남촌(無男村)’이라고 불렸다. 군인 2명이 북촌리 인근에서 무장대에게 기습당하자 군은 마을을 방화하고 이틀에 걸쳐 젊은 남자와 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극 속에서 여성들의 고통은 가중됐다. ‘20세 미만의 젊은 여성들을 끌고 갔으며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이 금덕리에서 데려온 한 처녀를 겁탈하려다 거부당하자 고문했다’는 기록 등을 미뤄 당시 전쟁 성범죄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2003년 공식 확정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9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가 민간인 희생자로 집계됐다. 당시 도민 인구로 계산하면 1/9가량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한국 전쟁의 민간인 피해가 전체 인구의 15% 내외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집단 학살이었는지 알 수 있다. 희생자의 33%는 여성과 노약자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희생자 중 11세에서 30세의 희생자 비율이 가장 높으며 그 비율은 57%에 달한다. 지금으로 치면 한창 학교 다니고 있을 사람들이 좌우 투쟁에 휩쓸려 산속을 헤매다가 무참히 살해당했다. 해안까지 봉쇄돼 고립됐던 제주는 거대한 학살장이었다.

 

이미 살이 삭아 들어 뼈만 남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시신은 못 찾았지만 죽은 이의 혼을 부르고, 비석이라도 세우고 그래야 되지 않느냐고 해서 묘소를 헛봉분으로 만들었습니다.” – 임문숙, 동광리 주민 -

 1954년 9월 한라산 입산 금지구역 지정이 해제됐다. 중산간 마을 피해 복구와 이주가 시작됐으나 1960년대까지 사건 전 인구의 절반 정도만 마을에 복귀했다. 제주의 전통을 간직했던 109곳의 마을이 무인촌(無人村)이 되어 자취를 감췄다.

 제주의 대표 관광지 정방폭포는 동광리를 비롯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여러 차례 학살된 곳이다. 유족들이 가족의 시신을 찾고자 폭포를 찾아 헤맸지만 주인을 알 수 없는 백골만 남아 시신 수습을 포기했다. 중산간 마을 부근은 지금도 시신이 없는 헛봉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토벌대는 한 청년이 학살극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자 그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 처가 식구들까지 ‘폭도 가족’이라며 몰살시켰다. 사태가 완화된 후 은신처에서 나온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군번은 0310413이다.” – 제주평화기념관 ‘폭도와 국가유공자’ 글 발췌 -

 한국 전쟁의 여파로 한국 사회 전반에 반공 사상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많은 제주도민이 섬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 이념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해병대 3, 4기에 자원했다. 당시 해병에 자원했던 생존자들은 “도민들은 노동당이니 공산당이니 하는 것의 실체를 전혀 몰랐다”, “입대 신체검사 중 친족의 4•3사건 연루 기록이 나와 떨어질까 봐 혈서 지원한 사례도 있다”고 증언했다. 도민들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전향을 증명하기 위해 지원한 경우가 많았다. 제주도민이라 따라오는 붉은색을 지우기 위해 빨간 명찰을 찼고 상륙작전을 위해 전국 각지로 향했다. 제주도민으로만 이뤄졌던 3,000명의 해병 3, 4기 중 321명이 사망, 1,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갖은 고초를 참고 명예회복을 위해 많은 청년이 목숨을 던졌으나 4•3사건은 역사 속에서 종적을 감춰가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사건 당시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 진압을 명령했고 미군 역시 제주 군경에 동조하며 사태를 동조, 방관했다.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조병옥은 제주에 서청을 보내 강경 진압을 명령했고 서청은 도민들을 학살했다.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던 전 외무장관 송요찬은 초토화작전을 포고하고 양민학살을 실행했다. 4•3사건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주도자 중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사정권의 입장에서 4•3사건은 대중이 알면 좋을 것 없는 역사였기에 사건은 철저히 은폐됐다.

 

기억이 말살 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 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말,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겁에 질린 섬사람들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 – 소설가 김석범 -

 6월 민주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 순이 삼촌을 비롯한 4•3사건 관련 문학 작품들이 다시 빛을 보았고 사건을 기억하던 사람들에 의해 4•3사건도 세상에 나왔다. 1999년 ‘4•3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문학작품 속에서 겨우 편린을 볼 수 있었던 4•3사건의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참여정부시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2008년, 비설을 비롯해 4•3사건 관련해 가장 많은 자료를 전시하는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이 개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70주년 4•3사건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해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전했고 올해 국방부와 경찰은 사건 발생 71년 만에 사죄의 뜻을 전했다.

 지난달 23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가 5•18묘역에 방문해 무릎 꿇고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 5•18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아픔에 공감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4•3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들과 그 측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4•3사건은 가해자들에게 사과 받지 못한 채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기억 속에 남았고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 역사 속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남로당의 존재와 진영 간 무력 충돌 사례로 인해 4•3사건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에 관해선 아직도 의견이 엇갈린다.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지금, 4•3사건에서 ‘사건’을 다른 표현으로 바꿀지 ‘사건’으로 계속 남길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결정해야 할 문제다. 다만 인간이기에 잊지 말아야 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집권 세력이 은폐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투명해지더라도 이 같은 학살극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70년 넘게 이어온 투쟁이 헛되지 않도록 기억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김범성 기자  12161416@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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