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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어와 정보의 민주화
  • [비룡논단] 안명철 교수(국문)
  • 승인 2004.04.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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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후문이 새로이 단장되어 웅장한 자태로 개통되었다. 아치에는 勤勉, 創意, 奉仕'라는 창학 이념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드높여진 창학 이념이 일부에게는 마치 머리에 지고 있는 무거운 짐과 같은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얼마 전 집 아이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뜻을 묻기에 빨간 양말'이라고 답을 해주었더니 보스턴 빨간양말'팀이라고 하면 참 우습다고 하였다.
 
위의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느낌은 실은 동일한 사실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것은 언어 기호가 표시하는 정보의 고도화와 이에 대한 언중의 소유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어떤 언어에서이든 기본개념어들은 환유와 은유 절차를 걸쳐 추상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의 의미를 표시하게 된다. 가령 짧은 시간을 뜻하는 틈'은 두 물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뜻하는 틈'에서 은유되어, 물리학의 단위인 뉴튼'은 실존 과학자의 물리학에 대한 기여에서 환유되어 생성된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새로운 의미는 그 단어의 원뜻과 의미 관계에서 유연성(有緣性)을 지니므로 누구에게나 그 의미는 쉽게 접근이 가능한 정보가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어가 표시하는 정보의 고도화와 관련하여 기본개념어인 우리 고유어는 이 점과 거리가 있다. 혹자는 추상적이며 전문적인 개념은 기본개념어와 다른 별도의 용어법을 지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당한 생각이 아니다. 컴퓨터 용어인 포맷팅(formating)'이라는 말은 영어의 기본어인 form'(틀, 꼴)에서 온 것이다. 이 과정을 고려하면 포맷팅'은 우리말로 틀잡기'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형식화'라는 말로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더욱이 신을 신다, 준비하다'의 뜻을 가진 boot'에서 생성된 부팅(booting)'의 대역어가 초기화' 또는 초기적재' 라면 그 용어의 어마어마함에 질려버리지 않을 수 없다.
 
전문영역에서 이와 같이 기본어와 무관한 용어를 채택하게 된 까닭은 우선 우리가 문화 수입국이며 이차적으로는 문화 수입의 주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되어 있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본인의 의식여부와 관계없이 별개의 전문용어'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정보를 독점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고유어의 전문화, 추상화 작업에는 주저하면서도 또한 한자어를 위시하는 전문어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에 놓여있다. 하지만 정보의 민주화에는 고유어의 용법 확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고유어 사용의 양적 확대만이 아닌, 질적 확대를 뜻하는 것이다. 사회의 민주화가 어려웠듯이 정보의 민주화도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日, 暉, 熙, 昱, 明'과 같이 해'나 빛'과 관련된 이름자를 쉽게 쓰면서도 '해, 햇빛, 빛, 빛나' 등의 이름을 붙이기를 주저하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글쓴이는 이 가능성을 인터넷 같은 데에 참여하는 화자들에게서 찾고 싶다. 비록 이들의 언어 사용 양상에 많은 우려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많은 국어 화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비룡논단] 안명철 교수(국문)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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