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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부평의 남쪽, 징용의 흔적

부평의 남쪽은 별세계다. ‘부평’하면 떠오르는 복잡하고 흥성거리는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알던 그 부평은 부평역 북부에 불과하다. 오늘 나는 ‘삼릉 줄사택’을 찾으러 처음으로 부평역 남쪽 출구로 갔다. 도심의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골의 것 같은 붉은 벽돌의 역사가 있었다. 건물 위에 얹어 있는 커다란 ‘부평역’이라는 역명판이 어색했다. 경인선은 남과 북을 가로지른다. 철길 저 너머에 롯데백화점과 부평 번화가 건물이 보였다. 내가 서 있던 이 곳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부평의 이런 모습은 낯설었다.

주택가 깊은 곳, 동수역 언저리에 삼릉 줄사택이 있었다. 낮은 구릉을 깎아 만들어 그런지, 내가 서있던 곳에서 줄사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줄사택이라는 말 그대로 반토막 난 우유곽 같은 집들이 몇 줄로 줄지어 있었다. 최근 주택재생사업으로 선정되고, 일제 징용 유적으로 주목받아 한결 깨끗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줄사택 일부를 허문 자리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주민 몇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줄사택의 대부분은 빈집이었다. 휑하니 지붕 위에 뚫린 구멍과 허물어진 벽으로 건물의 뼈가 드러나 있었다. 어림잡아 절반 이상의 집이 비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다는 걸 증언하듯 건물 안에는 동네 은행에서 받은 시계 등 가재도구가 먼지 쌓인 채 뒹굴고 있었다. 방 하나에 입구 쪽에는 부엌으로 썼을법한 공간이 작게 있었다. 벽지 속에 바른 신문지는 의외로 영자지였다. 어쩌다 영자신문으로 벽지를 발랐을지 궁금해져 신문을 자세히 봐 보았다. 발행 연도는 1952년. 한국전쟁 당시에 보수한 벽지가 21세기에도 멀쩡히 살아있는 셈이다. 지금은 폐가로 방치되고 있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았을법한 집이었다. 옆 골목은 정말 좁았다. 내가 처음 들어선 길은 차가 다닐 만큼 어느 정도 큰 길이었지만, 그 길 뒤편에는 사람 정도야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골목길이 있었다. 복잡했던 이곳의 역사만큼이나 얽혀 있는 전깃줄이 머리 위를 스치었다. 말 그대로.

삼릉 줄사택의 역사는 19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줄사택은 본디 히로나까 상공(弘中商工)이라는 광산기계 제작 기업에서 노동자 사택으로 지었다. 1942년 미쓰비시 중공업이 이 줄사택을 인수하고, 그 때부터 이곳은 미쓰비시 사택(三菱社宅)이 된다. 미쓰비시 사택,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즉 삼릉사택이다. 경인선 건너편 지금 부평공원 부지가 미쓰비시 공장이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본토 징용을 피해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이곳에서 징용당해 일했다고 한다. 부평공원 길 건너편에는 육군조병창이 있었다. 부평은 일제 군수 중공업의 전초기지였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로 화제가 된 군함도를 미쓰비시에서 운영했으니, 군함도 징용 희생자들과 줄사택의 옛 주민들도 연관이 있는 셈이다. 탄생부터 노동자의 집이었던 줄사택은 해방 후에도 지금까지 맘 편히 몸 누일 곳 없는 이들의 집이 되었다.

미쓰비시라는 지명은 아직 깊게 남아있다. 줄사택 주변에서 ‘삼릉’이라는 간판을 참 많이 봤다. 삼릉유통, 삼릉약국... 이 지역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부평동이지만, 아직 삼릉이라고 많이 부른다고 한다. 이 근처 지어진 동수역도 애초엔 이름을 삼릉역이라 할 예정이었지만, 일제의 잔재라는 지적에 옛 지명인 동수로 명명했다 한다. 근처에 왕릉이 세 개 있어 삼릉이라는 와전된 지명 유래마저 전해질 정도로 이곳의 역사는 오랫동안 묻혀있던 듯하다. 나 또한 최근 서경덕 교수가 삼릉 줄사택과 같은 전국의 징용 유적에 안내판을 설치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곳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부평 일대가 군수 공업지대였고, 일제강점기 말기엔 인천의 각급 학교의 학생들까지 부평의 각종 공장에서 징용을 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삼릉 줄사택은 도시 재생 사업 대상이다. 한 집에 ‘새뜰마을 사업’ 게시판이 붙어있었다. 그동안 방치되어온 줄사택에 어느 정도 주거개선 사업이 벌어지는 듯 했다. 줄사택은 단순 유적이 아닌 누군가에겐 살아가는 집이다. 유적으로써의 관리조차 받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취약한 주거 여건이 크게 개선되지도 않은 이 줄사택에도 변화가 이는 것이다. 최근 줄사택의 역사적 가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면 재개발 보다는 역사적 가치를 보존해 나가며 기존 주민의 취약 주거 여건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사업이 추진되기를 바랐다. 한편, 부평역사박물관은 삼릉 줄사택 지역의 학술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동안 방치되어 온 줄사택의 역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작업이다. 이제야 학술조사가 처음 대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공장은 군부대로,

또 다시 공원이 되어

옛 미쓰비시 공장 터, 부평공원으로 향했다. 선로 위 육교 끝에 서니 넓은 공원 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일 점심 무렵의 공원은 한산했다. 내가 걸은 이 길이 옛 노동자들의 출근길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쨌든 그들도 어느 길로 갔건 내가 지금 있는 부평공원 자리의 미쓰비시 공장에 출근해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본 밑에서 부역을 했을 것이다. 해방 후엔 미쓰비시 공장을 국군이 인수했다. 90년대 말까지 군이 점유하다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구 일본군의 육군조병창은 미군이 인수했다. 지금도 미군이 점유하고 있다. 지금의 부평공원 일대는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다. 공원에 서서 과거 공업단지 부평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긴 세월동안 변치 않은 건 공원 옆의 경인선뿐일 것이다.

인천은 항구다. 개항장이다. 서울과 가깝고, 경인선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역시 인천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주안 염전에서는 소금을 공급했고, 부평은 군수 중화학공업 기지, 그리고 월미도와 송도는 서울에서 한 시간이면 당도하는 경성 시민들의 위락지였다. 겨우 백여년 정도 된 역사이기에, 그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인천에 온지 이제야 2년 째가 되지만, 인천은 확실히 탐험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도시다.

 

박현호 기자  mediacircus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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