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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의 현대문학, 그 불우한 예감

O, O, O, O, O, O, O……. 이름 한 글자를 지우니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정지용, 임화, 이용악, 백석, 이기영, 이태준, 박태원.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저들은 월북문인으로 주인(朱印)되거나 의심되어, 몇몇 대학 연구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아서도, 읽어서도 안 되는 위험한 이름들이었다. 적색으로의 낙인, 그것이 저들의 작품집과 문예지에서 이름을 파내고 은폐케 하는 까닭의 처음과 끝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따라서 저들을 빼놓고는 문학의 사상적·미학적 볼륨이 매우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 그러니까 올림픽을 코앞에 둔 19887, 저 붉은 기호들은 40여년의 유폐 끝에 정부의 월북문인 해금조치에 따라 대중 앞에 슬프고 찬란하게 귀환되었다. 그러나 오해 말라. 해금의 때가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며, 따라서 세계만방에 한국의 문화적 위상과 이념의 자유를 널리 알려야한다는 지배 권력의 혜안과 시혜에 의해 저들이 돌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식민지 현실을 관통한, 따라서 어느 세대보다 정확하고 풍요롭게 식민지 조선인의 몰골을, 한갓 지방어의 위치로 떨어진 조선어의 설움을, 또 그래서 생생하고 두툼하게 조선적인 것의 본질과 미학을 묘파할 줄 알았던 저들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들인 것은 사상·표현의 자유, 미의 절대성과 사회성에 목말라 하며 잘 살아보세정의사회의 표어를 향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할 줄 알았던 각성된 하위주체와 시민, 지식인들의 분노와 예지였다.

얼마 전 집권 여당의 역사 바로세우기 포럼에서 저들의 후예이자 분단시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최인훈의 소설과 신경림의 시를 향해 백색 주술을 가장한 흑색 주술이 공공연히 발화되었다. 󰡔광장󰡕의 이명준은 포로석방 당시 왜 대한민국아닌 제3국을 택했는가?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은 무엇인가? 농무의 농민들은 새마을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행복이 약속된 농촌에서 왜 술판을 벌이며 울분과 한탄의 눈물을 토해내는가? 이런 방식의 왜곡된 이해와 분석은, 강연자 말을 빌린다면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기적의 힘에 대한 내용은 없고, 학생들에게 불평과 남탓, 패배감을 심고 있다는 지극히 편협한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최인훈과 신경림의 좌편향·왜곡된 작품이 실린 교과서는 그러므로 학생과 대중들의 미적 정서와 조화로운 세계 이해에 봉사하는 보편적 기호와 감각의 저장고가 아니다. “대한민국 부정세력” “자신들의 미래 전사를 길러내기 위한 도구적이며 폭력적인인 붉은 언어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시민의 자아실현과 행복의 충족, 그를 위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더욱 간절해질 때마다 출현하여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이 따위 불량한 마타도어를 어쩐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문학비평가 고() 김현의 말을 빌려 문학의 최소한의 도의를 밝혀두는 수밖에. “비록 우리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빈궁하고, 우리들이 쓰고 있는 언어는 조야(粗野)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과 언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이 사랑은 역사의 의미, 자유의 의미를 탐구하고 현실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임을 우리는 자부한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머지않은 시기 국어와 문학 교과서의 현실일 것이다. 이광수도, 이태준도, 정지용도, 임화도, 서정주도, 최인훈도, 신경림도 없는 교과서라니……. 강제된 문학 쭉정이 중고생의 불우는 그들을 교양인으로 성숙시키는 대학의 불행이며 또 그들이 오랜 미래 살아갈 현실의 재앙이다. 혼이 비정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이 순간에서다.

최현식 교수  inha@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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