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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그들, 국립서울현충원을 가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잔디. 그 위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묘비들이 서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고요함과 산뜻한 공기에 잠든 영들과 함께 있으니 온몸이 평안해지는 기분이다. 이따금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정숙을 유지한 채 돌아다녔다. 기자는 해맑은 얼굴로 할아버지들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한 아이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창한 일요일 정오의 지하철, 사람들의 시선은 각자의 스마트폰에 고정돼있고 내부엔 정적만이 흐른다. 모두 메신저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고 있다. 불과 두 달여 전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지난 84일 목함지뢰 사건부터 10일 대북심리방송, 20일 북한의 포격에 이어 22일 판문점 고위급 회담까지, 사방에서 전쟁난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낭설까지 나돌았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은 지난 825일 새벽 남북의 타협으로 마무리 됐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당시의 일을 잊겠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군인 2명은 텅 빈 다리를 보며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살 것이다. 당시 격분하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잊는다. 기자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고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품고 전쟁기념관으로 향했다.
전쟁기념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제1연평해전과 제2연평해전에서 활약한 참수리 고속정이다. 전쟁기념관 외부에 재현돼있는 커다란 참수리 고속정 옆으로는 각종 전투기와 전차들도 있었지만 최근 영화 연평해전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수리 고속정에 몰려있었다. 직접 배 위에 올라 살펴보니 곳곳의 상처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보여주는 듯 했으며 특히 배 이곳저곳에 총알을 맞은 흔적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알아보기 쉽게 빨간색으로 표시돼있었다. 또한 실제 전사자들의 마지막 위치에는 자세한 설명이 있어 이해를 도왔다. 배 내부를 둘러보던 도중 어렸을 적 부모님과 함께 참수리 고속정을 살폈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기자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그동안 우리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반성했다.
외부를 둘러본 뒤 곧장 전쟁기념관 내부의 호국추모실로 향했다. 호국추모실은 입구부터 어두웠으며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였다. 입구 정면에는 전사자 명부와 함께 추모하는 자리가 있었으며 좌우로 님들의 고귀한 희생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영원한 빛이 되셨습니다는 문구와 함께 촛불들이 놓여 있었다. 기자는 들어가기 전 추모를 한 뒤 그곳을 관리하시는 한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초를 밝혀도 되겠냐고 여쭈어봤다. 할머니는 원래는 안 되는데 학생이 기특해서 해준다며 기자에게 초를 줬다. 어떻게 이곳을 맡게 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받는 것은 없다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뿐이라고 답했다. ‘여기저기서 포탄 소리가 펑펑 나고다들 난리도 아니었어도망가기 바빴지남자들한테 먹을거리 가지고 오라하고 죽이고강간 같은 것은 어렸을 때라 잘 몰랐지만올해로 71세의 할머니는 직접 6·25전쟁을 겪은 만큼 전사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며 기자에게 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오는 길 할머니는 학생이 초 밝히는 거 사람들이 본 다음 초 밝혀도 되느냐고 물어봐서 곤란해라며 웃으셨다. 이어 전쟁기념관의 다른 곳들을 둘러보았지만 대부분 6·25전쟁에 대한 이론적인 기록들이었기 때문에 기자는 이걸 어째야 하나며 행복한 고민을 하시는 할머니를 뒤로한 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놀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주말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책하는 시민들이 있는 등 현충원은 묘지의 기능 외에 휴양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입구에서 조금 걷다보니 당당히 서 있는 현충문이 보였다. 현충문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에게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과 함께 방문소감을 적는 책자에 간단하게 소감을 남긴 뒤 드높은 현충탑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현충탑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고자 세워진 탑으로 탑 내부 위패봉안관에는 6·25전쟁 당시 전사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104천여 호국용사들의 위패와, 시신은 찾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7천여 무명용사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이외에도 현충원 내부에는 각종 희생자들을 기리는 탑과 비등이 많았는데 그중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6·25전쟁에서 전사해 대부분 유해도 찾지 못한 7천여 명의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탑이며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역시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군들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현충문을 나와 장병 묘역, 경찰 묘역을 비롯한 수많은 묘역들을 살폈다. 거대한 국가원수 묘역과 임시정부 요인 묘역, 장군 묘역의 묘지들에 비해 봉분도 없는 장병과 경찰들의 묘비는 너무나도 작고 초라해 보였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이들이 아닐까. ‘1971426일 월남에서 전사1975510일 서울에서 순직19501121일 경기 가평에서 전사기자는 이들 하나하나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묘역을 돌아봤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소는 총 54,443, 그중 사병의 묘소만 무려 36,181개다. 장병과 경찰들의 묘비는 수없이 많았지만 기자는 그 묘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 가슴속에 간직하려 했다. 이조차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시신조차 찾지 못한 희생자들에 비하면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196423일 수도통합병원에서 순직한 군인의 묘비에는 숭고한 희생을 기억한다는 학사장교 동기들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또 다른 묘비에는 빈 소주병만이 남아있었다. 수많은 묘비들에는 이들 모두가 각자의 삶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쓸쓸히 남겨져 있었다.
묘비들을 살피다 보니 시든 꽃들도 종종 보였고 많은 꽃들이 널브러져 있거나 묘비 주변의 정돈이 되지 않았었다. 기자가 묘비 근처를 정리하며 지나다닐 때쯤 어느 남녀가 소주 한 병과 꽃다발을 들고 어느 묘비를 찾았다. 남매로 보이는 듯한 남녀는 술잔을 비우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진기를 든 채 묘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미 있는 일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기자가, 아니 우리가 그들이 겪은 고통의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판단하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애국을 외치는 자들이 부쩍 늘은 것 같다. 그러나 기자가 막상 주변을 둘러봤을 때 지난 1일이 국군의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2002, 모두가 월드컵 4강에 열광할 때 누군가는 서해에서 나라를 지키다 전사했다. 영화 연평해전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기억하며 추모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가 떳떳하게 애국과 관련된 문제를 논할 수 있을까. 기자가 모든 묘역을 돌아보고 올 때까지 남녀는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이문규  ansrbcjswo@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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