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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1999년 인현동 화재참사, 16년 후 그들을 만나다.

동인천이 멈춘 날
  1999년 10월 30일 토요일, 그 날은 인천의 몇몇 고등학교의 축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축제가 끝난 후 학생들은 동인천으로 갔다. 달리 갈만한 놀이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동인천에서 어른들은 놀 곳 없는 학생들에게 술을 팔았다.  주로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영업했던 호프집 “라이브 2”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라이브2는 안전기준 미달로 폐업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업주는 이 호프집을 그대로 운영했다. 무전기를 찬 ‘삐끼’까지 두며 교복 입은 청소년들을 꼬드겼다.
 호프집 안에는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고, 일부는 호프집 밖 비좁은 계단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그중 두 학생은 생일을 맞아 각자의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기 위해 호프집을 찾았다.
 지하 1층 “히트 노래방”에서는 내부 수리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 공사를 마무리하며 뒷정리를 하던 아르바이트생 임 군과 김 군은 호기심이 생겼다. ‘시너와 석유 가운데 어느 쪽이 불이 더 잘 붙을까?’ 두 소년의 위험한 호기심은 큰 불이 되어 무섭게 건물 전체로 옮겨갔다.
 건물 2층에 있던 호프집에는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놀고 있었다. 생일파티를 하러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교복을 입고 있었다. 연기가 들어오자 호프집 직원은 불을 끄고 나가지 말라며, 돈을 내고 나가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혼자 도망쳤다. 창문은 합판으로 막혀 있었다. 출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창문이라도 열고 뛰어내려 사망자는 없었던 3층 당구장과는 대조적이다.
 화재는 20여 분만에 진화됐다. 그렇게 큰 화재는 아니었다. 2층 호프집 안 까지는 불이 번지지 않았고, 출입구만 타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방의 내장재가 타며 나온 유독가스가 뿜어져 나와 건물 전체는 가스실로 변했다. 신고를 받은 후 2분 만에 소방관이 도착했지만 수십 학생들은 이미 죽은 후였다. 소방관들은 원래 2인 1조인 근무방식을 깨고 산소통을 벗고 통로 사이에 3~4겹으로 포개어 쓰러진 한명씩 업고 밖으로 나왔다.
 결국 57명이 숨지고 81명이 다쳤다. 인천 전역의 34개 학교에서 피해자가 나왔다. 동인천 지역 상권은 붕괴했다. 백화점은 문을 닫았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던 보통의 술집들을 엄격히 단속하기 시작했다. 2015년 그 때 그 사건은 시간 속에 묻혀 버렸고, 그 때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얼마 후 현장을 다시 찾았다. 1층엔 연어 횟집이 새로 문을 열었고, 건물 계단으로 가는 입구는 굳게 잠겨 있었다. 대부분의 사상자가 발생한 2층 창가 안에는 버려진 노래방 시설이 살짝 보였다. 당시 뉴스화면에도 등장했던 ‘NBA 당구장’ 간판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과거 이 건물 지하에 인현동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뜻에서 소극장이 세워졌다가 없어졌는데, 그 흔적이 살짝 남아있었다. 사건 현장을 걸어가는 중년의 부부에게 혹시 과거 참사를 기억하느냐 물었다. “여기 불이 났었어?” “응 여기서 학생들이 죽었다니까. 아주 난리였어.” 보통 사람들에게 이곳의 기억은 이미 어렴풋이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바래버린 듯 했다.
 이곳에 서서 그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했던 5살의 나, 그때는 내가 이곳에 오게 될 줄 몰랐다. 16년 후 나는 인하대학교에 입학해 인천에 오게 되었고, 이 곳에 서게 되었다. 마음속에 뭔가 아리면서도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신문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졌다. 그들을 만나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담아 여기 사람이 있었다고, 어떻게 살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린 살아가고 있어요
  어렵게 유족회와 연락했다. 취재 의사를 밝히자 흔쾌히 기자를 유족회 정기모임에 초대했다. 9월 11일 그네들의 아들딸들이 스러져간 골목 지근거리에 있는 닭집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흔쾌히 이곳에 초대해준 이유를 말해줬다. 종종 기성 언론에서 연락이 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저 단편적으로 추도식 사진만 찍어갈 뿐 진심으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는 않는다 했다.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대학생 학보사 기자였기에 나를 이러한 그들만의 사적인 자리에까지 불러줬다고 한다 나와 초면인 사람들이었지만 나를 가족같이 친근하게 대해줬다. 나도 그들이 내 부모님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기자와 취재원과의 형식적 관계를 넘어 서로 인간적 정을 나눴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이재원(64)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족회장은 요즘 다들 어떻게 지내냐는 기자의 질문에 “잘 살아간다”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잘 지내지만 명절이나 경조사가 있을 때 아들의 빈자리가 느껴지면 ’아!‘ 하고 무언가 느껴져요. 친구네 아들딸이 결혼식을 할 때도 ’살아있다면 내 아들도 지금쯤 결혼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납니다.” 유족들은 한달에 한 번 이런 모임을 갖는다 했다. 중고등학생 아들딸을 둔 부모는 어느새 환갑을 넘겼고, 50대가 모임의 막내가 됐다. 자식이 사라진지 16년 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삶을 통째로 뒤흔든 화마를 가슴 한켠에 제쳐두고 그들은 살아간다. “자살할 정도는 아니니까...”라는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
 당시 그 사건은 작년의 세월호 사건처럼 전국을 뒤흔들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청소년정책은 뒤바꼈고, 사건현장에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까지 검토됐다. A 씨 사건은 곧 국민들의 관심에서 밀려났다. 정부의 사후처리나 보상문제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그들은 남겨졌다.
 그들은 세월호 유가족처럼 체육관에서 날을 지새웠다. 오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은 전날 말을 바꿔 오지 않았다. 90년대 말의 아직 고압적이었던 공무원들은 빈소에서조차 고압적이었다. 이재원씨는 빈소에서까지 꼿꼿했던, 추모 아닌 추모를 하러 온 당시 인천시장에게 호통을 쳤다고 밝혔다. A 씨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식어버린 관심뿐이었다.
 “추모비도 사건 몇 년 후에 우리 돈으로 세웠어. 그런데 변두리에 있고 주차 공간 근처에 있어 차가 가리곤 해. 세월이 흐르면 추모비가 흉물이다 뭐다 해서 밀려날 지도 몰라.” 그들은 추모비조차 사건 후에 자비로 세웠다. 이 곳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이 곳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저 편으로 밀려간다.
  참사가 일어났지만 그들은 살아간다. 사건이 일어난 “라이브 2” 호프집의 주인 정성갑 씨는 출소 후 몇 년 간 CCM 가수로 활동했다. 그 후 인천 연수구에 있던 한 학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나 현재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출동했던 소방관들도 살아간다. 16년이 지났지만 출동 당시 남았던 상처는 그대로인 듯 보였다. 인천소방본부에 그들을 만나고 싶다고 취재요청을 했을 때 담당자는 “당시 소방관분들은 인현동 참사와 관련해 언론과 접촉하고 싶지 않아한다”고 밝혔다. 참사현장 주변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도,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다들 살아간다.

 곧 10월 30일, 참사 16주기다. 청소년들이 놀 곳이 호프집밖에 없었던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사고현장 근처에 인천학생문화회관이 세워졌다. 그 한켠에 있는 작은 추모공간에 유족들은 다시 모일 것이다. 한 명 한 명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자식의 이름을 불러볼 것이며, 유해가 뿌려진 팔미도 앞바다에서 다시 한 번 자식을 만나러 갈 것이다.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본다.
 “그 옛날 이 곳에서 학생들이 죽었다.”
 

박현호 기자  mediacircus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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