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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사들의 로망, 오르간에 앉다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영혼은 향기이다” 지난 2006년 개봉한 영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다. 극중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덧없는 영역’인 향기를 얻고자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향수는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순히 악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됐지만, 오늘날 매력을 발산하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단 하나뿐인 향을 만들기 위해 촉촉한 가랑비가 더위를 식혀주던 어느 날,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향수공방을 찾았다.

‘퍼퓸 오르간’의 의미
 일주일 전 전화로 사전예약을 한 후 찾은 향수공방은 비교적 한적한 방배동 사이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더욱이 고요하게 느껴졌던 골목들을 지나 내부가 훤히 보이는 통유리문의 공방을 만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도착해 향수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도 곧 조향사의 안내를 받아 ‘퍼퓸 오르간’에 앉았다. 처음에는 단지 다양한 종류의 향료가 줄을 지어 있는 테이블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이 오르간은 조향사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수십 개의 향료가 진열된 곳에서 나만의 향을 조향한다니.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꽤나 근사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뿐인 향기 만들기
 향수 만들기에 앞서 조향사가 두 장의 테스트지를 나눠줬다. 어떠한 향을 만들고 싶은지, 선호하는 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자는 평소 즐겨 쓰던 가벼운 비누향을 토대로 여성스럽고 향긋한 향의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간단한 작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향수 만들기에 들어갔다.
 먼저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 되는 ‘포뮬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일반인이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매우 섬세할뿐더러 전문적인 영역이라, 그 향을 구현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방에서 준비된 A, B, C, D 총 네 가지의 포뮬러를 모두 시향하고 원하는 향을 고르는 과정이 이어졌다. A는 여성스럽고 은은한 꽃향기, B는 시원하고 깔끔한 향, C는 개성 있고 흔하지 않은 향, D는 과일향의 달콤한 향이었다. 시향 방법은 시향지에 용액을 한 번 콕 찍은 뒤 적당히 흔들어 시향 해야 하는데, 이때 알코올이 완전히 날아가도록 해야 제대로 된 향을 맡을 수 있다. 기자가 선택한 포뮬러에 어울리는 향료를 찾아 고민하던 조향사가 곧 다섯 종류의 향료를 꺼내왔다.
 먼저 말 그대로 5월의 장미라는 의미의 ‘May Rose’, 여름에 어울리는 과일향의 ‘Fruity Floral’, 상큼한 자몽에이드의 느낌이 나는 ‘Grape Fruit’, 풀숲의 쾌청함이 잘 느껴지는 ‘Bergamot’, 끝으로 꽃밭에 들어와 있는 듯했던 ‘Lily Of The Valley’까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정이 이어지는데, 처음에 받은 테스트지에 이 향들에 대한 느낌을 표현해 글로 적어보는 것이다. 단지 머릿속으로 맡은 향을 떠올리기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향에 대한 느낌을 더욱 정확히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베이스에 섞일 향료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최대 사용량을 20방울로 잡고 최소단위를 5방울로 정해, 원하는 향료를 준비된 베이스 포뮬러에 넣으면 된다. 자몽향이 강했던 Grape Fruit은 상큼했지만 다른 꽃향기와 조화롭지 않을 것 같았고, Bergamot은 나무 향이 강해 어떤 향이 나올지 상상이 어려웠다. 그래서 나머지 세 가지의 향 중 May Rose를 10방울, Fruity Floral, Lily Of The Valley를 각각 5방울씩 넣기로 했다. 스포이트로 조심스레 향료를 빨아들인 뒤 베이스 향료가 담긴 통에 옮겨 담았다. 어떤 향이 나올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조향사는 “May Rose를 중심으로 Lily Of The Valley가 장미향을 감싸고, Fruity Floral의 상큼한 향이 굉장히 조화로울 것 같다”며 “원하는 향기가 잘 나올 것 같다”고 말해 내심 안심이 됐다. 그렇게 향료 혼합을 마친 뒤 조향사가 용기의 남은 부분에 알코올을 채웠고, 향료와 알코올이 잘 섞이게끔 용기를 흔들었다. 1mL의 샘플도 100번 정도는 흔들어야 하는 만큼, 이 모든 향료들이 섞이기 까지는 직사광선이 없는 장소에서 약 2주간의 숙성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어떤 향인지 궁금해 향수를 뿌리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조향사는 “실제로 향수를 만들어 간 뒤 알코올향이 진하게 난다는 컴플레인이 오기도 한다”며 “매실주를 만드는 과정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만든 향수를 일정기간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뿌리는 것은 매실주를 만들고 주류와 과육이 혼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시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은 바로 기자가 만든 향수에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이었다. 기자는 마침 방문했던 날을 기념해 ‘May 30th’라고 이름을 붙였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5월의 끝자락에서 특별한 향수를 만든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조향사를 꿈꾸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조향사를 처음 만난 기자는 여러모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어떤 계기로 조향사를 꿈꾸게 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곽혜경 조향사(이하 곽 조향사)는 “처음 전공은 음악이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그만 뒀다. 그 후 예술과 관련된 일을 포기할 수 없어 어떤 일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내가 향을 좋아하고, 평소에 향에 민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향수를 좋아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향기만으로도 떠오르는 이미지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계기를 전했다. 여기서 ‘향기로 이미지를 표현하다’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곽 조향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알게 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해당 향수공방이 국내 1대 조향사로도 불리는 정미순 조향사(정 조향사)가 운영한다는 사실이었다. 정 조향사는 과거에 향수를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가고 싶은 곳이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향수마을인 ‘그라스’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의 체계적인 운영시스템이 정 조향사에게 감명을 줬고, 고심 끝에 이를 국내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공방 내부를 둘러보니 실제로 정 조향사가 만든 다양한 향수들이 전시돼있었다. 평소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생소한 브랜드의 향수여서 그런지 향 또한 흔하지 않고 고급스러운 향이 대다수였다. 이외에도 ‘황진이 향수’라는 향수가 있었는데 이름부터 시향 하는 방법까지 무척이나 독특했다. 향도 붉은 매화향이라는데,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는 향이었다.
 그렇게 가지각색의 향수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을 무렵 정갈하게 포장된 향수를 받고 공방을 나섰다. 밖은 한참동안이나 내리던 비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향, 기억의 도구
 흔히들 후각은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연히 맡은 냄새로 어떤 장소나 어렸을 적 기억들이 떠오르거나 누군가의 체취나 향수냄새로 잊고 있던 사람이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향기가 있다. 그 향기로 사람을 기억하게 하기도 하고,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 자리에 없어도 향기는 남듯이 우연한 기회에 만든 이 향수가 앞으로 나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길 바라며, 자신만의 향기를 갖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평주연 기자  babyeonn@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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