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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역사를 걷다

 본교 박물관과 한국학연구소에서는 매학기 학우들을 비롯한 교수님,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역사기행을 진행한다. 각각의 역사기행마다 테마를 정하는데, 이번 테마는 예년보다 특별했다. ‘2015 유네스코 세계 책의 수도’로 인천이 지정된 것을 기념해 ‘기록문화유산의 보고(寶庫), 강화’를 테마로 선정했다. 강화도는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일컫는 고려대장각의 판각이 이뤄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선원사 터’부터 조선 기록문화의 꽃이라 칭송받는 ‘외규장각 의궤’ 등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기록문화유산의 성지’다. 필자도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당일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마지막 답사지인 ‘정족산사고’만 방문하기로 했다. 

▲ 소중한 것을 지키는 곳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에 위치한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보관을 담당하던 공간이었다. 알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정리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당대 왕조차 열람하지 못하게 하며 지켜왔던 중요한 기록이기에 무엇보다 조심히 보관돼야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실록이 소실됐고, 조선후기 모든 실록이 산으로 이동했다. 산이라는 공간은 관리와 보존이 힘들지만, 선조들이 후대까지 자료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설치했고 강화도에 위치한 정족산사고 역시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효종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됐다. 정족산사고가 다른 사고보다도 더욱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임은 당연한 얘기다. 선조들의 훌륭한 선택은 정족산성을 찾아가는 가파른 산길, 그곳을 오르는 사람들의 끈적이는 땀과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증명했다. 봄날 같지 않게 뜨거운 햇볕에 지쳐갈 때쯤 다행히 저 멀리 성문이 보였다. 드디어 정족산성과 마주했다.
 성문조차도 예사롭지 않았다. 필자를 포함한 역사기행 팀이 올라간 문은 남문이었다. 성벽 주변으로 방어시설이 존재했다. 다소 간소해 보이는 세 개의 구멍이 바로 ‘여장’이라 불리는 이 시설이었다. 이 날 해설을 담당한 정민섭 강화고려역사재단 연구원은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라고 하는데 총이나 활이 바로 아래로 떨어지도록 구조돼 있다. 성벽 가까이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용도이다. 양쪽 끝에 있는 구멍은 멀리까지 나가게 돼 있어 ‘원총안’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했다.
 그리고 학창시절 국사를 배웠다면 알겠지만, 이 정족산성은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라 감탄할 만한 곳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 정족산사고를 만나다
 엄하게 지키던 정족산성 남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나무마다 새록새록 새 잎이 나오고 있었고, 그늘이 감싸던 입구와 달리 양지바른 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까와 달리 풀내음과 함께 향불 냄새가 온 몸을 휘감았다. 세포 하나하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고 어느새 그 향에 취해 있었다. 15분정도 더 걸었을까. 마침내 조선왕조실록의 수호사찰이라 불리는 전등사를 만날 수 있었다. 전등사 뒤편 즉 정족산성 북문과 연결된 곳에 그토록 고대하던 ‘정족산사고’가 있었다.  
 전등사는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며 조선왕실의 보호를 받아왔던 사찰이다.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세보’를 보관한 곳도 정족산사고이다. 그러나 지난 1931년경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는 채 파손됐고, 주춧돌과 함께 빈터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난 1999년 현 상태로 복원한 상태다. 필자는 책을 보관하던 창고라고 하기에 드라마에서 보던 창고를 상상했다. 실제로 본 정족산사고는 마치 사대부가의 집처럼 보일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높이 솟은 소나무 몇 그루가 그 위상을 더해주는 듯 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듯이. 감히 네가 여기가 어딘지 아냐는 듯이 묻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족산사고에서 직접 조선왕조실록을 만날 수는 없었다. 모두 전등사 정족산사고를 떠나 현재 정족산본이라는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돼 있기 때문이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문화유산이기에 철저한 관리가 필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선조들이 최고의 보관 장소라고 꼽았던 이곳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녹이 슬은 표지판이 눈에 밟혔다.
 
▲ 전등사, 간절한 기도는 계속 된다
 한편 전등사는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그만큼 불교 신자들의 방문이 계속됐다. 전등사 내부에는 부처님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나 하늘과 맞닿을 듯이 달려있는 연등이었다. 한 구석에 흰 연등이 가득했는데 흰 색이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나 같이 ‘극락왕생’이라고 적혀 있었고, 각각의 연등 밑에는 소원 카드가 달려 있었다. 마치 좋은 세상으로 이끌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더 놀라운 점은 대웅전을 따라 길게 늘어선 연등들이었다. 필자는 살아생전 그렇게 많은 수의 연등을 본 적이 없었다. 딸기 모양, 연꽃 모양 등 모양뿐만 아니라 색도 화려했다. 평소 불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아기자기한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특히 ‘관불’이라고 해 아기 부처 몸 위에 물을 끼얹어 목욕을 시켜주는 의식이 있었는데 아기 부처가 정말 앙증맞았다. 신자도 아닌 내가 보기에도 귀여운데 신자들의 눈에는 얼마나 어여뻐 보일까 생각했다. 신자들은 차례대로 돌아가며 아기 부처에게 정성껏 목욕을 시켜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바라며 저토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간절한 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복수를 담은 간절한 기도는 무섭다. 대웅보전에 있는 ‘나부상’이 대표적인 상징물 아닐까 싶다. 나부상은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로 대웅전 귀퉁이 아래에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 상으로 이와 관련해 2가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했다. 가장 유력한 전설은 노총각 도편수와 주모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고향을 떠나 전등사 대웅전을 짓던 도편수는 절 아래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주모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도편수는 일하면서 받은 모든 품삯을 주모에게 가져다줬고,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 그랬듯이 일이 끝난 뒤 주막에 가보니 주모가 그동안의 재물을 모두 챙겨 떠났다. 도편수는 믿을 수 없어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공사가 끝날 때쯤 주모의 모습을 조각해 부끄러운 모습으로 대웅전이 없어지는 그날 까지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도록 형벌을 줬다고 한다.
 한 남자의 무서운 복수의 사연만 있는 게 아니라 여자의 무서운 사연도 있다. 정화궁주가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아 간 원나라 공주에 대한 복수로 나부상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영원히 무거운 지붕을 안고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정신을 차리라는 바람으로. 이럴 땐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는 옛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부상의 찡그린 표정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소원카드, 나부상 모두 부처 앞에서 아이처럼 바라는 그대로를 표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이는 모든 종교에 예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함께 역사탐방을 다녀온 본교 법학과의 한 교수님은 “오래전 자녀들과 함께 왔었을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자녀가 어려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는데 잘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훗날 자녀들과 한 번 더 방문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녀들이 나이가 서른이 넘어 따라올지 모르겠다”며 웃으셨다. 우리 기록문화유산의 역사와 함께 잠시나마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면, 정족산사고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강지혜 기자  jj030715@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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