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제학술대회 참가 차 중국 칭다오(靑島)의 중국해양대학을 방문했다. 칭다오는 산뚱성(山東省)의 해양도시로, 기후와 풍경이 매우 온화하고 아름답다. 또한 도시 곳곳에는 1900년을 전후한 유럽풍의 건축물이 여전히 우뚝하다. 하지만 그 푸르른(靑) 풍광 뒤에는 그곳을 조차(租借)했던 독일과 일본의 식민주의가 점점이 박혀 있다. 그러니 응당 이렇게 물어볼 법하다. 중화(中華)의 패배와 좌절을 상기한다면, 그때의 굴욕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이나 유적 따위는 되도록 없애고 숨기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중국해양대학은 독일군의 연병장과 지휘부 건물을 연구 시설로 적극 활용 중이다. 또한 다른 곳에 위치한 현재의 본 캠퍼스 역시 외방인의 건축물을 본떠 교사(校舍)와 기숙사, 연구동을 세웠다.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현대적 변용으로 보아 무방한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해양대학 전체를 휘감는 고딕 양식과 적갈색의 지붕들이 선명히 떠오르는 까닭은 건물의 기능 못지않게 심미성을 존중하는 감각 때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연구실이 있는 하이테크관 15층에서 학교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아파트 숲이다. 아직 이전하지 않은 공장들이 몇몇 남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하대 본관과 인하공전의 비행기는 이륙할 활주로조차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옹색하게 지하철과 버스로 동동거리며 비좁은 학교 주변을 벗어날 생각만 할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새로 부임한 최순자 총장은 대학과 지역의 연계 활동, 특히 대학의 청년문화와 지역의 일상문화의 탄탄한 결속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환영되고 응원되어 마땅한 포부이다.
 대학이 지역을 겉돌면 동서양의 유수한 대학이 보여주는바 그것이 자리한 지역 고유의 ‘장소’의 친밀성과 활동성을 기대키 어렵다. E. 렐프에 따르면,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진정한 장소란 삶과 동떨어진 유흥과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자아의 고유함과 충만한 기억을 허락하고 지켜주는 곳임을 알려준다.
 과거의 치욕을 오늘날의 유연하고 이채로운 면영(面影)으로 뒤바꾼 칭다오와 같은 곳을 인하대 주변에서 찾으라면 어디가 좋을까. 중구청 근처의 ‘인천개항장거리’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과연 그곳은 개항으로 융성했으나 오히려 해방 후 산업화의 물결에 뒤쳐지며 저개발의 공간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그 뒤늦음이 현재 인천의 근대와 다문화의 풍광을 대표하는 문화거리로 거듭나는 아이러니를 낳았음에랴. 하지만 만약 이곳이 지역민과 이주자의 내밀한 삶과 취미, 그를 향한 타자의 연대감을 온전히 보장하는 ‘장소’가 아니라 구경거리 중심의 박물관과 유흥의 ‘공간’으로만 남겨진다면 어떻겠는가. 그곳의 역사와 미래는 거의 예외 없이 공백 처리될 비극적 운명에 던져질 것이다.
 인하대 주변의 지역문화와 청년문화가 선순환적인 것이 되려면 지역에 대한 소통과 기여가 봉사활동 차원으로 좁혀져서는 안 된다. 인하대에는 한국학과 문화예술, 첨단 IT기술, 해양?항공 산업 등에 걸쳐 인천과 전방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수한 자원이 수두룩하다. 이런 분야를 중심으로 지역문화 건설에 동참하거나 확산일로의 평생교육 제도를 지역민에게 적극 환원하는 방법 등을 진지하게 고려할 시점이다. 학생들 역시 인근 초중고생들과의 만남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의 인성과 실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축제나 다양한 문화정책을 통해 인하대를 널리 알리고 지역민들을 대학 구성원의 일부로 참여시키는 방책도 고려함직하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자. ‘학교의 운명이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기는커녕 지역의 운명이 학교의 운명을 뒤바꾼다’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한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고.

최현식(국어교육과 교수)  inh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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