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김현승 시인의 계절이다. 그의 시들은 근원 깊은 고독이고 열매처럼 익고 마침내 상(傷)해 아름다운 향기를 피우는 가을이다. 차라리 마음을 편케도 하고 애상에 잠기게도 하는 그의 시 「가을의 향기」는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라고 읊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육체(실체)는 유한하여 언젠가 가고 만다. 그러나 그 육체는 그 나름의 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하고 마는, 상하고 말아야 하는 우주의 진리는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가슴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것인가. 그것은 하늘처럼 높고 깊은 유일한 자의 뜻일지 모른다.

김현승은 이렇게 가을이 의미를 사색(思索)으로 제시한다. 그 사색의 내용은 앞에서 인용한 구절 그대로 우리 생(生)의 유한함이다. 산 위의 마른 풀 같은 유한함! 그렇다면 그 유한함의 끝에 남는 향기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쪽 과수원에서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요, 들가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라고 김현승은 말한다.

모든 익어가는 것은 곧 시들어 상해 가는 것이라는 덤덤한 듯하면서도 종교적인, 철학적인, 시 구절을 읽으면서 이제 머지않아 더 깊어질 가을을 생각해 본다. 진정 우리 가을에 임금이 익는 냄새와 장미들이 시드는 겸허한 향기가 피어오를 것인가. 문득 지난 어느 봄날에 문태준 시인이 쓴 글 몇 행(行)을 떠올린다.

“봄이 왔건만 세상의 인심이 봄이 온 것을 느끼지 못함은 왜 그러한가. 오히려 거칠고 날이 선 말의 포만 시대에 살고 있다. 인심이 야박하고 잇속에 밝다. 분노와 폭력은 일상화되었다. 진영으로 나뉘어 세차게 싸울 기세다. 양보와 화해의 회합이 없다. 인정사정없이 뭇매를 때리고 포격한다.”

비단 봄날뿐만 아니라 이 가을의 문턱에 다다라서도 그의 탄식은 여전히 이어질 것 같다. 향기 없는 이기, 아무런 사색이 없는 쟁투! 그는 이어서 말한다.

“장자에는 심재(心齋)의 가르침이 나온다. 심재는 마음을 굶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마음의 가난은 무엇인가. 마음을 쓰되 속세간의 허욕과 분별하는 마음을 덜어내고 본래의 마음인 빈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너와 나,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더럽고 깨끗함, 사랑과 미움 같은 이분법적인 헤아림을 끊어버린 자리가 빈 마음일 것이다. 바로 대립을 초월한 자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굶겨야 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향기를 남기고 떠나야 한다. 능금처럼, 장미처럼, 마른 풀처럼……. 이것은 문태준 시인이 말한 대로 마음의 가난, 곧 빈 마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 돌아보라. 캠퍼스는 이제 가을이다. 이 가을은 하늘만큼 깊고 높은 사색으로 익는 그런 가을이 되어야 한다.(2013. 8. 11. 인하대 학보 비룡논단 원고)

김윤식/시인․전 인천문인협회 회장  inhanews@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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