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들어 캠퍼스에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 인경호 주변이 그렇고, 교내 가로수가 짙은 녹색향기를 내뿜고 있다. 4월초까지만 해도 남아있던 한기가 이제는 아련해지고 있다. 온난화때문에 봄, 가을이 사라지고 겨울이 지나면 여름, 여름이 끝나면 겨울이 오게 된 건 아닌지란 생각을 해본다. 못내 즐기지 못한 따스한 봄날의 햇볕이 아쉽다. 따스한 봄날의 추억, 낙엽 뒹구는 가을의 정취는 그립더라도, 작렬하는 태양과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을 고대할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과는 달리 내 전공인 금융․경제분야는 온통 잿빛 연기이다. 청년실업, 고용없는 성장, 양극화, 불공정사회, 복지담론, 낙수(落水)효과 회의론이 바로 그것들이다. 휴일이나 방학때 종종 들리는 시립도서관에는 청년․대학생들이 취직준비와 씨름하고 있다. 30~40대 직장인들도 경쟁에서 살아남기에 하루하루가 숨 가쁘다. 내가 속한 학부도 신설전공이어서 취업률 제고를 위하여 나 자신도 학생들을 내 몰고 있다.

우리경제가 숨 가쁘게 성장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 과실은 소수에게 편중되고 서민․청년층에게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고용없는 성장, 청년실업이 그 반증이다. 잘난 소수가 성공할 경우 그 과실이 평범한 다수에게도 확산된다는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몇 해 전 이슈가 됐던 "공정 사회" 논의도 이러한 인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미국은 낙수효과에 대한 과거 기억으로 1980년대 부유층에 대한 조세감면을 실시했는데 결과는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과 꼭 같다. 중진국을 빠르게 건너뛰고 선진국에 진입한다지만 가계소득은 뒷걸음치고 청년실업은 증가하면서 살기는 퍽퍽해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남을 돕기보다는 내 것을 챙기고, 신뢰보다는 불신, 타협하기보다는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사회가 되고 있다. 과거 정(情)많은 사람, 착하다는 말이 이제는 멍청하다는 뜻이 되고 있다. 봄․가을이 사라지면서 따스한 추억보다는 따가운 태양과 매서운 겨울만이 남는 격이다. 양극화를 해결할 지도자가 나오면 좋겠지만, 환상이다. 이보다는 봄날의 온기를 퍼트릴 힘이 더 중요하다. 모두가 리더이고 따르는 사람은 없는 세상, 모두가 귀족이고, 하인은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양극단의 매개자가 필요하다. 소수의 승자와 리더보다는 허리역할을 담당할 중간자가 필요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허리가 사라진 세상은 따가운 여름만큼이나 퍽퍽한 세상일 것이다. 이보다는 내가 중간층이 되고, 우리 인하인들이 우리사회의 담장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 속담에 굼벵이가 담을 잘 쌓는다는 말이 있다. 서두르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굼벵이처럼 한걸음씩 느긋하게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려고만 하는 사람은 조급할 수 있다. 그러나 견고한 담을 쌓으려면 말릴 시간과 끈기가 필요하다. 500년 조선의 임금과 가문들은 사라졌지만 고궁의 창연한 담장은 오늘도 당시를 설명하면서 미래를 제시한다. 이제 불볕더위가 곧 다가올 시점이다. 그러나 굼벵이가 쌓은 담장아래 그늘에 앉아 낙엽향수로 뒤덮일 가을을 고대하면 더운 여름도 한결 지내기 수월할 것 같다.

한재준 글로벌 금융학과 교수  inhanews@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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