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을 거의 그대로 빌려와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꾸어 생명을 유지한 지가 벌써 56년이 되었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된 사람들은 모두 이 법에 의하여 처벌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시대부터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 시도 때도 없이 간첩단이 발각되고 처벌되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 법의 이름으로 얽어 넣은 것이 그 얼마든가. 이 법 아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목숨의 수는 또 얼마인가.
요즈음 이 법의 폐지에 관한 대통령의 언론표명을 계기로 보수세력은 마치 물때를 만난 새우떼들처럼 여기저기서 세를 과시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을 침해하고 헌법을 유린하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매체를 통해 퍼뜨리고 있다.
먼저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보안법은 어떤 관계인가. 국가보안법은 국체를 보위하는 가장 중요한 법인가. 애초에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한시적인 법이다.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났으며, 다시 이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순천지구 주둔 제 14연대와 그 인근 주민들에 의해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은 이를 주도하거나 적극 가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생정부는 내란행위자 내지는 남로당원을 단속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이었다. 즉 형법이 없었으므로 형법 제정 전까지 유효한 법, 즉 한시법으로 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형법 제정 후에도 살아남았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는 반대 정치세력의 제거 수단으로 사용된 바도 있다. 심지어 소위 문민정부라던 김영삼 정권 아래에서도 사회주의과학원 사건, 희망새 사건 등 공안정국 조성용으로 악용된 바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나라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한 번도 그러한 역할을 한 적이 없다.
한시법으로 탄생했던 것이 생명을 연장시킨 것도 편법에 의한 것이었으며 각종의 악세서리를 단 다양한 무기를 가진 악법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문명국가의 수치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헌법유린인가. 우리 헌법은 정치세력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이미 여러 차례 개정되어 거의 누더기가 된 형편이다. 이렇게 헌법도 개정되고 심지어 어떤 때에는 거의 새로운 제정에 이르기까지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은 폐지할 수 없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논리이다. 정의에 맞지 않는 법은 개정되거나 폐지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국가보안법은 이제까지 실제로 남용되었던 전적이 있고 또 앞으로도 남용의 소지가 큰 반인권법이다. 형법의 개정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은 수용하고 국가보안법은 이제 그만 없애야만 한다. 그것이 정의의 길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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