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사극다우려면 잘 고증된 의상과 세트 등이 필수이지만 예스런 말투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투는 의상과 세트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어학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연구를 하더라도 신라시대의 말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시청자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극은 최소한의 어미와 어휘, 그리고 표현으로서 사극임을 드러낸다. ‘소인의 불찰로 심려를 끼쳐 드려 대단히 송구하옵니다.’라는 말이 쓰였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극일 것이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말을 써서 예스런 느낌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스런 표현을 적극적으로 되살려 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총리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사람들은 여지없이 인사 청문회장에서 ‘송구합니다’란 표현으로 말끝을 맺고 있다. 이들은 여러 의혹과 질문에 대해 딴청을 부리기도 하고, 우기기도 하고, 머릿속의 기억을 스스로 지우기도 하고, 아내와 자식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며 최대한 발뺌을 한다. 그러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란 말로 애원을 한다.

사전을 보면 ‘송구하다’는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로 순화.‘로 풀이되고 있다. 말 그대로 무엇인가 두렵고 그로 인해 마음이 거북스럽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이력이나 공직자로 임명된 이후의 행태를 보면 두려움과 거북스러움의 본질이 다르게 느껴진다. 저지른 과오가 두렵고, 국민의 심판이 두려워야 할 테지만 이들은 혹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 같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느라 마음이 거북스러워야 하지만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나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거북스러운 듯이 보인다.

이들이 거북스러워할 만하다. 한때는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이중국적 등이 공직자로서의 자질에 치명적인 흠결로 치부되기도 했고 이것 때문에 낙마한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이러한 것들이 흠결이 아닌 공직자로서의 ‘스펙’인 양 인식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상황이 되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중에서 이러한 과오 아닌 과오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한 사람들이 보란 듯이 임명이 되는 과정을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본래 부끄러운 것이지만 모두가 그러니 굳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인사청문회 자리에 서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들 다 하듯이 자녀에 대한 무한사랑으로 위장전입을 몇 번 했을 뿐이고, 효과적인 재테크 수단으로 부동산을 열심히 사고팔았을 뿐이며, 세계화 시대를 선도해 나가기 위해 다양한 국적을 유지해 왔을 뿐이다. 청문회를 보면서 분노하는 사람들도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가 아닌 ‘기회만 된다면 나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먼지는 늘 생기기 마련이고, 털면 먼지가 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먼지일 때 용인이 되는 것이지 자갈이나 바위일 때는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자갈과 바위가 많아지더라도 그것이 먼지로 치부될 수는 없다. 털지 않아도 스스로 삐져나오고 떨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용납될 수는 없다. 비록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라도 찾아보면 인간적인 먼지만 나올 사람이 어디엔가는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도 없다.

사극은 사극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사극의 표현을 쓰는 것은 영 거북스럽다. ‘송구한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면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서서 ‘송구합니다’라고 말할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성우(주간, 한국어문학전공 교수)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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