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논단] 나의 블루오션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10여 년 전 미국 인디애나 주의 겨울은 너무 춥고 길었다. 나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그곳에서 여러 번의 겨울을 보냈는데 매년 변함없이 4월까지 겨울 코트를 입고 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 바람을 막아주는 산 하나가 없어 겨울이 유난히 춥다는 선배 이야기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겨울이 없는 LA에서 오래 살아서 추위에 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내 전공이던 전자공학에 대한 자신감 위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불편하고 스산하던 내 마음이 죄 없는 인디애나 겨울 탓만 하게 만든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마음씨 좋은 지도교수에 논문 주제도 척척 잘 잡는데, 종일 도서관에서 논문을 뒤적거리면서도 아무 결실이 없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지 일 년 중 거의 반년을 두꺼운 코트에 얼굴을 가리고 도서관에서 숨어있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금요일 오후,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는 세미나 광고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Why is an engineer like me working as a lawyer?(왜 엔지니어가 변호사 일을 할까?)" 흠……. 글세……. 엔지니어는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변호사는 변호사로 일을 한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용이 궁금해 세미나가 열린다는 강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미나 강사는 내가 소속해 있던 인디애나 주 퍼듀 대학의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엔지니어로 일을 하다가 진로를 바꿔 로스쿨에 진학해, 현재는 특허전문변호사로 워싱턴 DC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특허전문변호사는 수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술과 법을 같이 알아야 하는 자격조건 때문에 전문가가 별로 없어, 후배들에게 이를 소개하기 위해 모교를 찾았다는 그녀의 설명에, 나는 어디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세미나가 끝난 후 강사를 직접 찾아가 인사를 했고 그 이후에도 로스쿨 입학, 변호사 직업 등에 관해 여러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일 년의 준비 끝에 나는 로스쿨에 합격을 했지만 절친한 대학원 동료들이나 선배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변호사를 하려면 애초에 전자과를 전공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견도 있었고, 특허만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솔직히 세미나 내용과 세미나 강사와의 대화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고 이처럼 주변 의견도 부정적이어서,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도 나의 속마음은 앞날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나는 코트 속에 숨어 있었던 나의 모습이 싫어 뒤돌아보지 않고 로스쿨로 발을 내딛었고, 세미나 내용을 통해 상상만 했었던 나의 블루오션을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내가 로스쿨에 입학했을 당시 입학생 중 공학 전공자는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고 전자 분야 전공자는 나뿐이었는데, 우리학교에 새내기 변호사를 뽑기 위해 찾아오는 로펌의 대부분이 전자과 전공 지적재산권변호사를 찾고 있었다. 내가 직접 찾아 나섰던 블루오션은 나에게 상상도 못했던 기회들을 주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내가 늘 그리워하던 고국, 그리고 나의 고향 인천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도 해 주었다.

하지만 1998년 내가 만났던 블루오션은 지금 2009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현재 지재권 분야는 우리나라 공대생들이 졸업 후 높은 관심을 가지는 분야고, 내가 특허전문변호사로 삼성전자에 근무할 당시 특허팀은 엔지니어들의 전배 희망 1순위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본인이 공학 전공이기 때문에 졸업장만 믿고 철저한 준비 없이 특허전문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면 큰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특허변호사는 법조인이기 때문에 변호사로서 필요한 법률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기술, 즉 쟁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되는 법을 찾고, 빠른 시간 내에 본인이 분석한 의견을 글과 말로써 명확히 표현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기술면에서도 전공뿐 아니라 최신 기술의 동향, 미래 기술의 예측 및 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올해 겨울, 큰 코트에 얼굴을 가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진로상담을 하러 온 나의 4학년 제자들에게 난 어떤 블루오션을 제시해 줘야 할지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고민하고 있다.

이수미 지적재산학 교수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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