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방학 중 독일에 연구차 들렸던 동료 교수는 현지인으로부터 “당신 자녀들도 학원에 다니느라 바쁜가요?”라는 질문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들은 것은 놀랍게도 우리말로 똑똑히 발음된 ‘학원’이라는 단어다. 우리와는 먼 낯선 세계 사람들이, 그것도 우리말이라곤 몇몇 명사만 겨우 알법한 외국인이 어떤 연유로 ‘학원’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짐작컨대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현지 TV 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의 사교육 열풍의 진풍경을 접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이국에서까지 진풍경으로 전해질 법한 우리의 사교육 열풍은 필자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얼마든지 실감한다. 밤 11시가 지날 무렵부터 자정 이후까지 때 아닌 교통정체가 시작되는 것이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집 또는 또 다른 학원으로 실어나를 대형버스들과 자가용들이 서로 뒤엉켜 빽빽이 도로를 점거한다.

아이들의 출퇴근과 출장(?)이 클라이막스에 오른다. 이만하면 우리 아이들도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유목적 삶에 충분히 적응한 셈이라고 본다면 이 광경을 보고 그다지 눈살을 찌뿌릴 것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해왔던 공교육이 점차적으로 사교육에 그 권위와 자리를 내주고 있는 실정은 우리나라뿐만 아닌 세계적인 추세다. 최근 미국의 대학입학전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입학사정관협의회는 각 대학에 대학입학시험의 반영비율을 낮추고 고교내신의 반영을 상향조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고교교육이 날로 발전해가는 시험 준비 전문기관들의 발빠른 전략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사회비평을 즐겨하는 식자들은 학교가 개인들의 학력이나 자격을 인증해 주는 권위만을 남기고 원래의 교육 기능을 상실해갈 것이라고 서슴치 않고 발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국책연구기관들은 앞다투어 교육제도의 질서가 개인 능력주의에 따른 무한경쟁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구도 하에 미래의 교육제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새로운 청사진들을 내놓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굳건히 자리잡은 ‘사커맘’ 현상도 지난 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생긴 새로운 풍속도이다. 사커맘은 아이들이 전문사설기관의 관리에 따라 축구를 배우는 동안 삼삼오오 모여 비로소 그들만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학부모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키워나간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유행어다.

여기서 아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찾아주기 위해 끝없는 구매욕을 쫓는 부모들 사이에서 수많은 정보들이 교환된다. 조금이라도 뒤쳐진다면 그것은 인생의 낙오를 의미한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아이가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바지런히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못하는 것은 생존경쟁에서의 낙오를 의미한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생기는데 수많은 요인들이 구조적으로 복합되어 작용한다. 우리의 사교육 광풍은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전통적인 교학 숭배 풍토는 둘째 치고라도 사회변동의 엄청난 속도와 더불어 중산층의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는 점이나 아이들이 소비 주체로 떠올랐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손꼽을 수 있다.

물론 소비 주체치고는 그들이 구매한 상품을 향유하긴 커녕 주체조차 못하는 요상한 주체지만 말이다.

겉은 후기산업시대의 소비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근대 산업시대에 값싼 노동력으로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비추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 이래 훈육과 처벌의 대상으로 혹독하게 다루어졌던 아이들의 존재는 시대를 달리하여 여전히 부침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스컴은 혹독한 야학 생활을 견뎌야 하는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 간간히 다루지만 그것을 보는 성인들은 마치 자신들은 공범자가 아닌 양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다. 만약 선거연령이 지금보다도 훨씬 낮아져 아이들에게도 투표권이 허용된다면 목하 아이들이 처한 환경은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누군가의 농담 또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느 누구도 한밤중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가를 헤매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씁쓸한 안타까움 한번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우리가 알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은 사라져간다는 비명만이 메아리쳐 울릴 뿐이다.

<손민호(교육) 교수>  webmaster@inh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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