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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판문점, 그곳에서 일상을 약속하며

우리 학교에서부터 북쪽으로 50km만 이동하면, 넘어선 안 되는 금기의 공간이 있다. 바로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우리가 흔히 ‘판문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곳곳에 서 있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이곳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판문점은 동서로 길게 뻗은 군사분계선 중에도 한반도 분단 문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3년 휴전 논의 시 원만한 회의를 위해 만들어진 후 70년이 지난 지금, 평화와 비극이 공존하는 그 현장에 가보고자 한다.

판문점으로 한 발짝 다가서다

지하철을 타고 문산역에서 내리면 판문점으로 안내할 차량이 기다리고 있다. 설렘 반 긴장 반, 아리송한 마음을 안고 차량에 몸을 싣는다. 2019년 이전에는 민간인이 개인적으로 방문하기 어려웠지만, 이후 변경된 규정으로 피 터지는 견학 예약만 성공한다면, 누구든 판문점에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본격적인 판문점 탐방 전, 반드시 들려야 하는 코스가 있다. 바로 임진각. 사실상 대한민국 내에서 민간인이 갈 수 있는 가장 북쪽 땅이다. 평화의 종부터 자유의 다리까지,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는 각종 기념물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날은 아쉽게도 신원확인과 간단한 안내 영상 시청을 한 후 이동해야 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견학 내내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 줄 목걸이와 기념 카드를 손에 쥐고 JSA 안보 견학관행 버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민간인 출입통제선(이하 민통선)의 시작을 알리는 관문에 도달한다. 민통선은 한반도 비무장 지대의 남방 한계선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엄숙해진 공기가 버스 안을 감돈다. 버스 양쪽으로 보이는 임진강과 철교 사이로 야트막한 높이의 지붕, 그리고 도라산이 보인다. 버스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일반적인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계속해서 이동하다 보면 중간중간 JSA 소속 군인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인원 체크를 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겁을 먹게 된다. ‘장소와 상황이 주는 중압감 때문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이 끝나면, JSA 안보 견학관에서 부대 소개 영상과 주의사항을 교육받는다. 교육이 끝나면 고대하던 판문점 여정이 시작된다.

남한과 북한의 충돌, 아픈 과거들

철문이 열리면 GOP 철책선이 보이는데 살면서 본 철책선 중 가장 큰 모습이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크고 긴 경계는 기자를 단숨에 압도한다. 철책선 너머로 광활한 논이 펼쳐진다. 이곳은 JSA 인근에 있는 대성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곳이다.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마을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면 태극기와 북한 인공기가 보인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를 견제하듯 높게 뻗어 있다. 두 국기가 떨어져 있는 거리는 남한과 북한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듯하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런 풍경을 지나 마주한 건 ‘돌아오지 않는 다리’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왜 돌아올 수 없었을까?’라는 의문이 머리를 스칠 때쯤 군인들의 설명이 시작된다. 1953년 6.25 전쟁 휴전 협정 이후, 양측의 포로들은 남과 북 중 한쪽을 택해야 했다. 단, 이 선택은 번복할 수 없어, 다리를 건너면 다신 돌아오지 못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빨간 다리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이 이상했다. 이 다리를 건너야 했던 포로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의 심정을 7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헤아려 본다.

바로 이어 제3초소에 도착한다. 이곳은 북한군 도끼만행 사건이라는 참극이 벌어진 장소다. 1976년 8월, 유엔군사령부(유엔사) 경비대대는 유엔사 측 제3초소와 제4초소 사이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북측에 이미 통보된 사항이었음에도 북한군 30여 명이 유엔사경비대대원을 공격했다.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로 유엔군 측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베럿 중위가 사망했고 미루나무가 있던 공간엔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사람이 도끼로 죽었다는 사실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가라앉은 분위기도 잠시 이제 버스에서 내려 직접 걸어가 볼 시간이다. 제3초소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이북 땅의 기정동 선전마을은 우리가 항상 북한과 맞붙어 살고 있음을 새삼 실감케 한다.

제3초소를 지나 군인의 통솔에 따라 걷다 보면 북에서 귀순하던 병사에게 쐈던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총알이 지나간 다섯 군데는 그날의 급박했던 상황을 증명하는 듯했다. 선연히 기둥에 남아있는 총알 자국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주고받은 상처 자국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남한과 북한 모두의 마음속에도 남아있는 상처가 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잔혹함 사이 핀 평화라는 꽃

기둥을 뒤로 하고 마저 걷다 보면 ‘자유의 집’에 도착한다. 자유의 집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파란색 목재 다리와 그 뒤로 보이는 갈색 표지판이다. 바로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前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담소를 나눴던 도보다리다. 이는 표지판을 제외한 모든 게 당시 사용됐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쉽게도 직접 도보다리에 갈 순 없어 실제 표지판을 보진 못했지만, 당시 남북회담 현장에 직접 와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의 집에서 나오면 ‘판문점’을 검색했을 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 T1, T2, T3 회담장이 있다. 2018년 남북정상이 처음으로 악수를 나눈 바로 그 장소다. 회담장 너머로 은색의 판문각이 눈에 들어온다.

파란색 컨테이너 세 개 뒤로 보이는 은색 판문각을 한 발짝만 넘으면 북한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그 주변을 빙 둘러본 후, 네 건물 중 유일하게 방문할 수 있는 T2 회담장으로 들어선다.

T2 안에는 한국, UN, 미국 국기가 꽂혀있는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다. T2가 특별한 점은 바닥의 선을 기준으로 남한과 북한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발짝 걸으면 북한, 다시 돌아오면 남한∙∙∙. 한 끗 차이인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많은 고민에 잠긴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북한군과  살갑게 이야기하며 농담도 하곤 했지만, 이젠 서로를 경계하기 바쁘다는 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니.

안에서 나와 공동기념식수 장소에 도착하면, 비석에 새겨진 ‘평화와 번영을 심다’가 눈에 들어온다. ‘평화와 번영’. 뒤편으로 보이는 곧게 뻗은 소나무의 기개 넘치는 모습에 소나무가 담고 있는 평화와 번영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만 같다.

우리에게 판문점이란

장명기 상병 추모비에서 묵념을 하고 나면 우리의 길었던 여정이 끝이 난다. 다시 임진각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쓸쓸함이 찾아왔다. 어쩌다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게 당연한 사이가 된 걸까? 아마도 오랫동안 지속돼 왔던 분단의 상처들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한 채 천천히 곪아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견학에 참여한 대학생 이기환 씨는 “38선 이북은 국제법상 대한민국 영토가 아니기 때문에 철원은 대한민국 주권이 없고 행정권만 반환받은 상태일뿐더러 판문점 견학도 유엔사 측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이에 대한 문제를 책으로만 읽었는데 실제로 보게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렇듯 견학은 필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안겨줬다.

흔히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찾은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닌 ‘일상’이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을 되찾으려 했던 이들의 노고를 이 글로나마 헤아려 본다.

김민진 기자  12212895@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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