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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담론] 고언(苦言)-의사봉의 무게
이기원 기자

지난달 말, 다음 보도 주제를 고민하던 중 새로 생긴 중앙세칙을 해설하는 기사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총대의원회(총대)를 통과한 세칙을 꼼꼼히 읽어봤다. 그러던 중 꽤 충격적인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견책' 징계를 규정한 「징계등에 관한 세칙」 제14조였는데 2항은 이러했다. ‘징계 혐의자의 사과문 작성으로써 견책한다.’ 그다음 항은 더 가관이었다. ‘징계 혐의자의 사과문을 공중에 게재할 수 있다.’

견책(譴責)이란 잘못을 꾸짖고 책망한다는 뜻으로 큰 벌을 내리지 않되 잘못한 사실을 기록에 남기고자 할 때 쓰는 징계다. 그런데 총대는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거로는 부족했는지 기록 내용에 당사자의 ‘사과’문을 포함했다. 견책 징계를 받은 자는 사과문을 공고해야 하며 이에 따르지 않을 시 파면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총대에서 의결한 이 조항이 정치학을 전공한 필자에겐 낯설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하는 '자아비판'과 별반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북한에서는 매주 자기 잘못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자아비판을 진행한다. 한 탈북자는 이를 두고 “정신적으로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스스로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도 강제로 사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헌법은 이런 ‘양심추지행위’ 즉 양심을 일정한 언동에 의해 간접적으로 표명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를 엄금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비행을 저질렀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 본심에 반해 깊이 '사과한다' 하면서 사죄 의사표시를 강요”하는 행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판시했다.(89헌마160) 국회가 만든 법에 의해, 적법한 재판 절차를 거쳐 사과를 강요하는 경우에도 이는 ‘헌법 위반’이다. 법률도 아닌 일개 ‘정관’에 불과한 학생회칙이 사과를 강제한다는건 언어도단이다.

총대 의장단이나 회칙연구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회칙안이 대의원총회에서 그대로 통과됐다. 아무도 이에 대해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올라온 의안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고 문제점을 따져 논하는 게 대의원의 역할 아니던가? 어떤 대의원도 역할을 해내지 못했으니 누군가는 나서야만 했다. 즉시 노트북을 켜서 수정 의견서를 적어 내렸고 총대에 제출했다.

다행히 총대 측에서는 해당 내용을 향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만약 그때 세칙 해설을 보도 주제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세칙 전문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다면 그 내용은 그대로 우리 세칙이 됐을 테다. 대의원의 말 한마디에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저 '죄송합니다'를 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자치기구 임원들은 '우리한테 감사한 줄 알아라' 'O, X로 대답하라’는 대의원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어야 했으리라.

입법권은 삼권 중에서도 가장 큰 권한이다. 이 글은 총대가 의사봉의 무게를 깨닫기를 바라며 바치는 고언(苦言)이다. 악감정은 없다. 필자 역시 제43대 총대의원회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기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회칙개정 투표에 참여한 5,052명의 학우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걸어줬다며 탄식하는 일이 없도록 기자 임기가 다할 때까지 펜을 멈추지 않겠다.

이기원 기자  qnal44@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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