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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즐기다-시집] 쓸쓸한 세계에서

낙엽이 지는 가을이 끝나간다. 어느덧 불어오는 찬 바람 탓인지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가을 끝자락,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백석 시인의 시집 ‘사슴’을 추천한다. 일제강점기를 관통한 시인의 시에서 쓸쓸함에 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다. 시집에서는 쓸쓸한 현실과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를 묘사한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신 년이 갔다 /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여승(女僧)의 한 구절이다. 남편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일찍 죽었다. 죽음을 도라지꽃으로 비유한 표현에서 마음이 아려온다. 여인의 가정이 무너졌고 희망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 줌의 재로 남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를 읽고 울지 않을 수 없다.

여승은 백석 특유의 ‘쓸쓸함’이 잘 드러나는 시다. 일제강점기 당시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 공동체는 해체되고, 우리 민족 특유의 정을 잃어가던 애달픔을 담아냈다. 여인의 한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1930년대 민족이 겪은 아픔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아픔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도 잘 드러난다.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여승과 마찬가지로 쓸쓸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은 여승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여승에서는 쓸쓸함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묘사할 뿐이다.

나타샤에서 화자는 쓸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순수한 세계로 도피하려 한다. 냉혹한 현실 세계를 버리고 단절된 산골에서의 삶을 꿈꾼다. 그리고 나타샤를 기다린다. 초기 시 ‘여승’과 비교했을 때 쓸쓸함을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이상향을 추구해 나간다. 순수성을 추구하는 화자의 모습은 아름다우나 공허하다. 초월적인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에 매달리면 현실은 당연히 더 힘들다. 그렇다면 쓸쓸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백석은 독자에게 고민거리를 던진다.

나타샤는 없으나 여승은 있다. 나타샤의 시에서처럼 유토피아는 없다. 그러나 여승의 삶은 현실에 드러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공허한 이상이 아닌 진부한 현실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현실은 분명히 가혹하다. 그러나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 현실의 쓸쓸함에 생각의 환기가 필요할 때 ‘사슴’에 수록된 33편의 시를 거닐어보자. 백석이 펼쳐내는 쓸쓸함의 길을 거닐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푹푹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온다.

박재형 수습기자  qkrwogud0@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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