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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하와이 이민의 역사, 인하대학교의 역사가 되다하와이 이민 120주년 특집 기획
하와이 이민 당시 사용된 여권
내리교회의 교인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한인
하와이 이민자 함하나 할머니

‘인하대학교’가 ‘인천 하와이 대학교’의 준말이라는 것은 본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다. 그렇다면 본교의 설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와이 이민은 어떤 역사를 갖고 있을까? 하와이 이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곳,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았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한국이민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인천항 부두를 지나 마침내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한국이민사박물관’이라고 쓰인 안내판이 보였다. 곧장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이었던 탓에 박물관 내부는 조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세계지도가 보였다. 잠시동안 지도를 바라봤다. 바로 그때 어린 자매가 엄마와 함께 박물관으로 들어왔다. 조용했던 박물관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근처에 있던 팸플릿 몇 개를 챙겨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 하와이

관람코스의 시작, 2층으로 올라갔다. 코스의 입구답게 벽에는 유이민이 있었던 1860년을 시작으로 공식적 이민이 진행됐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민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볼 수 있었다. 각 시기별로 적힌 내용을 쭉 훑어가며 첫 번째 관람 장소로 향했다.

사탕수수 농장이 성행했던 하와이는 부족한 노동력 충당을 위해 중국과 일본사람을 데려왔다. 그들의 이민이 계속되고, 외국인이 많아지자 미국에서는 각 나라 사람의 비율을 비슷하게 조정하는 법을 제정한다. 그 결과 중국인과 일본인의 이민을 중단하고 한국인을 모집하기로 결정한다. 선교사 알렌과 그의 사촌 데쉴러 그리고 내리교회 교인들의 주도하에 하와이 이민에 대한 홍보가 시작된다. 그때 쓰인 홍보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월 십오 원 (대한 돈으로는 50원가량) 씩이고, 일하는 시간은 매일 십 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에는 휴식함’ 홍보문 내용의 일부다. 40전 정도가 닭 두 마리 가격이었던 당시 50원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이외에도 홍보문은 누구나 혹할 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렇게 모집된 인원 102명이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행 갤릭호에 탑승한다.

홍보문 뒤쪽으로는 당시 사용된 여권이 보였다. 수첩 모양인 지금의 여권과는 사뭇 달랐다. A4용지 크기인 여권에는 영어와 한자 그리고 프랑스어가 주를 이뤘다. 특이한 점은 여권발급을 위해선 외교부 역할을 했던 유민원 총재 도장 이외에도 여권 주인을 보증하는 보증인의 도장이나 서명이 필요했다. 누구나 쉽게 여권을 만들고 다른 나라에 방문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다음 장소로 옮기자 첫 하와이 이민자들과 그들이 가지고 갔던 짐들이 보였다. 비록 102명의 모든 사람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른부터 아이까지 하나 같이 무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그곳에서 꿋꿋이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인천 제물포항에서 갤릭호를 탄 102명의 사람은 호놀롤루에 도착했고, 신체검사를 통해 16명이 탈락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상륙을 허가 받아 미지의 땅 하와이 입성한 인원은 86명이었다.

 

바로 옆쪽엔 이민자 중 한 명인 함하나 할머니의 증언이 있었다. 배를 타고 하와이로 가는 동안 겪은 일들이 적혀 있었다. 화물칸에서 몇 날 며칠을 버텨 낸 것이다. 글을 천천히 읽어 나가던 중 할머니의 육성이 들려왔다. “배 속에서 배 기름 냄새하고, 소말을 넣어서 소말 냄새가 나고, 구역질이 나고, 밥을 먹으라고 빠기가 땡땡이를 땡땡땡 치면 다른 사람들은 가서 밥을 가져와 먹는데 나는 구역질이 나고...”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할머님의 목소리는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의 고된 나날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피운 꽃

다음은 하와이에 도착한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전시장이었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에는 무성하게 자란 사탕수수 사이 낫을 들고 허리를 굽힌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채찍이다. 채찍을 본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사람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나라 간 협약을 통해 공식적 이민을 온 이민자들에게 채찍이 웬 말인가?

그 외에도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썼던 물통, 도시락, 신분증이 보였다. ‘방고’라 불린 당시의 신분증에는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4자리 번호가 전부였다. 먼 타지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아닌 번호로 불렸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력 충당을 위한 이민이었기에 하와이 이민자 대부분은 젊은 남성들이었다. 하와이에서 시간이 지나고 결혼할 여성이 부족하자 남성들은 한국에 자신의 사진을 보냈다. 그 사진을 보고 결혼 상대를 정해 하와이로 찾아간 여성들이 바로 ‘사진 신부’다. 사진 신부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나무 책자에 담겨있었다. 그렇게 이름도 몰랐던 타지에서 한인들은 노동을 시작으로 가정도 꾸리며 점차 하와이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한쪽에는 하와이에서 한인들이 세웠던 학교의 모습이 있었다. 칠판과 분필 그리고 하나로 붙어 있는 긴 책상, 오랜만에 보는 교실 안 풍경이었다. 이때에도 한국의 교육열은 지금만큼이나 상당했다. 기존에 먼저 있던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교육열만큼이나 불타올랐던 것이 바로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머나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국민회 등 협회를 만들고, 피땀 흘려 번 돈은 독립운동가가 자금을 걷으러 왔을 때를 대비해 항상 준비해 뒀다. 그렇게 1902년부터 3년간 64회에 걸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사람이 총 7,400명이다. 한국 이민의 첫 신호탄이었다.

 

우리의 후대들에게

마지막으로 마주한 ‘인하관’에서는 인하대학교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 이후 시간이 흐르고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시기, 한인들은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하와이 현지에서 가족을 꾸린 뒤 오랜 시간을 보낸 탓에 선뜻 한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할 수 없었다.

나라의 상황 역시 좋지 못했다. 광복은 했지만 1950년에는 한민족이 둘로 나뉘는 뼈아픈 전쟁이 발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7,000여 명이 넘는 한인 중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1,000명에서 2,000명 사이였다. 돌아오지 않은 인원 중 약 1,000명은 미국 본토로, 그 나머지 한인들은 하와이 생활을 계속 유지해 갔다. 미국에 남은 그들은 정부수립 활동에 참여했고, 6.25전쟁 동안에도 필요한 물품을 보내며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비록 몸은 타국에 있었지만,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한없이 컸다.

단순한 지원뿐만 아니었다. 조국의 발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들은 한국에도 MIT와 같은 공대가 생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공대를 만들기 위한 모금이 시작됐지만 모인 기금만으로는 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웠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인기독학원을 매각해 15만 달러의 대금을 마련했고, 거기에 정부 보조금과 국민들의 기부금 그리고 인천시가 기증한 땅이 더해져 ‘인하대학교’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하와이 동포들과 나라를 생각하고 후대를 위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마침내 1954년 인하공과대학이 최초의 공식 이민 출발지인 인천에 설립됐다. 이후 1970년 종합대학 ‘인하대학교’로 승격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인하대학교는 단순히 하와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와이 동포들의 정신적 귀환을 나타내는 상징인 셈이다.

 

조선의 ‘어머니’란 말

 “로씨야의 ‘마마’보다도, 카사흐의 ‘아빠’보다도 구루씨야의 ‘나나’보다도 조선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엔 뿌리 더 깊다.” 김준 시인의 「조선 사람이다」의 일부다. 비록 몸은 조국과 멀리 있어도 그들은 한국인으로서 정체성만은 굳건히 유지하고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의 고된 생활 속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단어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자신을 혹사하면서도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지원해 준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섰다. 박물관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박물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후 발걸음을 돌렸다.

오는 2022년은 하와이 이민 120주년이 되는 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이 그토록 흔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씩 우리의 역사를 되새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하루쯤 우리 학교의 역사를 돌아보며 동포들의 마음을 느껴보자. 그들이 우리를 위해 힘써준 것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원종범 기자  yawjbeda@inh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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